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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05월 03일
도1.
![]() 《4096가지 색채》 (4096 Colours, 4096 Farben) 1974년 254cm×254cm 캔버스에 에나멜(가정용 합성 폴리머 페인트) Catalogue Raisonné: 359 [임근준의 20·21세기 미술 걸작선: 게르하르트 리히터 VS 박미나] 게르하르트 리히터의 《4096가지 색채》 게르하르트 리히터(Gerhard Richter, 1932-)는, 1966년 《스케치(색채 견본집)》(Sketches[Color Chart])라는 작업 구상안을 제작했다. 철물점에서 사용하는 색채 견본집을 캔버스에 옮겨 그리려는 계획이었다. 본디 청년 리히터는, 동료인 시그마 폴케(Sigmar Polke)와 함께 ‘자본주의 리얼리즘(Capitalist Realism)’을 표방하며 독일식 팝아트를 추구했던 작가다. 따라서 ‘색채 견본집’ 연작의 첫 발상은, 손으로 그린 여느 팝아트 작품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를 실제로 제작하는 과정에서 의미심장한 미(학)적 변환이 발생했다. ‘색채 견본집’ 연작의 제1기는 1966년으로, 《열 폭의 대형 색채판》(Ten Large Colour Panels)이 대표작이다. (비고: 《열 폭의 대형 색채판》은 1966년에 구상됐고, 1971년과 1972년에 두 해에 걸쳐 완성됐다.) 철물점에 비치된 실제의 색채 견본처럼 뵈게끔, 작가는 세로로 긴 열 폭의 캔버스에 각각 열 개의 (가로로 긴) 직사각형을 나란히 배치하고 에나멜 도료(가정용 합성 폴리머 페인트)로 특정 색상을 구현했다. 캔버스의 오른 쪽에 자리 잡은 빈 백면―젯소를 바른 캔버스의 밑바탕 그대로인―이, 모델이 된 색채 견본집의 같은 위치엔 본디 색상의 명칭이 적혀있었으리라는 점을 상기시킨다. 마치 색상표를 캔버스에 확대 재현한 것처럼 뵈므로, 일견 팝 아트의 기본형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은 모습이다. 하지만, 각 색상은 작가의 자유 선택에 의한 재현이었고, 또 크게 옮겨 그린 결과, 다소 추상화 같아졌다. (비고: 의도적으로 사람의 평균 신장보다 조금 큰 높이로 전시되도록 고안된 캔버스의 크기는, 작가가 애초에 건축적 비례에 관심이 있었다는 점을 말해준다. / 색상을 임의 선택했다지만, 회색이나, 노란색, 녹색 등에선 [다소 부정확한] 그러데이션의 양상이 드러난다.) 리히터는 이렇게 회고했다: “색채 견본집이 그 자체로 회화 같아 보였고, 무척 멋졌다.” 화가는 색채 견본집에서 색상을 묘사적 상징적 표현적으로 다루는 전통과 절연하고, 기하추상을 둘러싼 도그마에서 벗어날 수 있는 해답을 발견했다: “색채 견본집이 제시하는 색상 패턴의 아름다움은, (요제프) 알베르스 류의 신구성주의의 노력과는 정반대되는 것이었다.” 1971년 리히터는 ‘색채 견본집’ 연작에서 개성이 표출될 가능성을 보다 줄여보고자 작품 제작 방식에 변화를 줬다. 이때가 제2기다. 대표작은 1972년 베니스비엔날레에 출품했던 《180가지 색채》(180 Colours) 넉 점. 가로와 세로가 공히 2m인 정사각형 캔버스에 가로 열 12줄, 세로 열 15줄로 180개의 색상을 (색상표처럼 흰 테두리를 남기고) 나란히 배치했다. 특기할 점은 색상을 제작하고 적용하는 수학적 방식. 삼원색(빨강·노랑·파랑)의 유화 물감을 서로 섞어 12가지 기본 색상을 만들고, 이 12가지 기본색을 다시 어두운 방향과 밝은 방향으로 각각 일곱 단계씩 변화를 줘 168가지 색상을 파생시켰다(밝아지는 그러데이션 84색 +어두워지는 그러데이션 84색 + 12가지 기본색 = 총 180가지 색상). 이렇게 제작한 180개의 물감에 일일이 번호를 매기고, 네 개의 캔버스에 임의 추출 공식으로 뽑은 번호를 매겨 채색 작업을 진행했다. 따라서 넉 점의 그림은 모두 동일한 방법으로 제작됐고, 동일한 색채를 담았으나, 각각 동질하지 않은 개성을 지녔다. 1973년에 완성된 《1024가지 색채》(1024 Colors)는, 가로 32개, 세로 32개의 색상을 담은, 높이 254cm에 너비가 478cm에 이르는 대작으로, 역시 넉 점이 제작됐다. 화가는 색상을 제작하는 방식에 재차 변화를 줬다. 이때부터 1974년까지가 제3기다. 에나멜 도료의 삼원색(빨강·노랑·파랑)과 밝은 회색을 네 가지 기본색으로 삼아, 16가지 색상, 64가지 색상, 256가지 색상, 1024가지 색상, 4096가지 색상을 만들었다. 역시 이렇게 제작한 각 물감에 일련번호를 매기고, 네 개의 캔버스에 임의 추출 공식으로 뽑은 번호를 매겨 채색 작업을 진행했다. 1974년에 제작한 《1024가지 색채》 8점과 《4096가지 색채》(4096 Colors) 1점에서, 화가는 색상이 서로 직면하도록 백면을 없애버렸다. 물감 제조나 색상 배치 방식은 같지만, 비로소 《4096가지 색채》에 이르러 ‘색채 견본집’ 연작은 픽셀 회화로 진화한 셈이다. 이 작품을 사진 수정 프로그램으로 흐리고 또 흐리면, 당연하게도 결국 중명도의 따뜻한 회색이 남는다. 이는 1971년에 개시된 ‘회색’ 연작에도 연루되지만, 무엇보다 리히터의 출발점인 사진-회화의 뿌리―사진의 색소―로 재귀한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디지털 사진기는 1975년 처음 개발됐다. /// 추신) 1966년 ‘색채 견본집’ 연작을 구상한 뒤, 작가는 바로 첫 번째 컬러 사진-회화 《엠마(계단 위의 누드)》(Ema[Nude on a Staircase])(1966)를 제작했다. 이는 컬러 사진을 다색 유화 물감으로 재현한 뒤 붓질로 뭉갠 작업이다. 추신2) 색상에 관한 고찰은 곧 비가시성이란 주제로도 가지를 뻗었다. 1967년에 시작된, 화면 전체를 회색 유화 물감으로 가득 메우는 ‘회색’(Grey) 연작이 바로 그것. ‘회색’ 연작은 4년 뒤인 1971년, 회색 유화 물감을 캔버스 전면에 도포하고 마르기 전에 손가락(혹은 붓)으로 화면 가득 선형을 그려 넣는 ‘복원화(회색)’(Inpainting[Grey]) 연작으로 이어지며 가지에 또 가지를 쳤다. 추신3) 리히터는 《4096가지 색채》를 끝으로 ‘색채 견본집’ 연작을 중단했다가, 2007년 33년 만에 《4900가지 색채》(4900 Colors)이라는 말년작을 발표했다. 25가지 색상을 담은 정사각형 패널 196개로 꾸며지는 대작으로, 11가지 버전을 거느린다: 제1버전은 196개의 패널로 하나하나 나뉘고, 제2버전은 49개의 패널로 구성되고 … 제11버전은 한 개의 패널로 완성된다. 《4900가지 색채》에서 색상값과 위치는 컴퓨터 프로그램으로 임의 추출됐다고 전한다. 재료는 에나멜 도료와 알루-디본트(Alu-Dibond). 즉, 알루미늄판에 에나멜 도색 후 플라스틱으로 마운트했다. http://www.gerhard-richter.com/art/paintings/4900-colours/ 추신4) ‘색채 견본집’ 연작은 대개 에나멜 도료로 제작됐다. 하지만, 1966년 첫 해에 세 번째로 제작한 ‘색채 견본집’인 《192가지 색채》(192 Colours)는 유화다. 작가가 이후 줄곧 에나멜 도료를 고집한 까닭은 유화 물감으로 제작한 색채 견본집이 “너무 그럴듯했기 때문”이라나. 흥미롭게도 베니스비엔날레 출품작인 《180가지 색채》(180 Colours) 넉 점도 유채다. 국제적 행사에선 (작업 철학보다는) 그럴듯해 뵈는 게 더 중요하다고 판단했던 것일까? *<퍼블릭아트> 2012년 4월호 게재 원고. **미교열 원고입니다. 퍼옮기지 마시길 부탁합니다. (링크와 RT는 환영합니다.) 도2. ![]() 《열 폭의 대형 색채판》 (Ten Large Colour Panels, Zehn große Farbtafeln) 1966/71/72년 250cm×950cm 캔버스에 에나멜 Catalogue Raisonné: 144 도3. ![]() 도4. ![]() 《180가지 색채》 (180 Colours, 180 Farben) 1971년 200cm×200cm 캔버스에 유화물감 Catalogue Raisonné: 300-3 도5. ![]() 《256가지 색채》 (256 Colours, 256 Farben) 1974년 222cm×414cm 캔버스에 에나멜 Catalogue Raisonné: 352-1 도6. ![]() 《1024가지 색채》 (1024 Colours, 1024 Farben) 1973년 254cm×478cm 캔버스에 에나멜 Catalogue Raisonné: 350-1 도7. ![]() 《4, 16, 64, 256, 1024가지 색채》 (4, 16, 64, 256, 1024 Farben, 4, 16, 64, 256, 1024 Colours) 캔버스에 에나멜 1974년 쾰른의 츠비르너갤러리 설치 장면. Catalogue Raisonné: 353-1, 353-2, 353-3, 353-4, 353-5 도8. ![]() 2012년 05월 0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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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1122223333444556677888999000AABBFGgJoVvWwx》 2012년 캔버스에 아크릴릭 200×450cm [임근준의 20·21세기 미술 걸작선: 게르하르트 리히터 VS 박미나] 박미나의 ‘회색 하늘’ 화가 박미나(MeeNa Park, 1973-)의 ‘회색 하늘(Gray Sky)’ 연작은, 그의 ‘사이비 과학’적 작업 세계에서 별개로 성장해온 두 가지가 하나로 합쳐진 결과로, 일종의 회화적 키마이라(Chimaera)다. 가지의 하나는 1999년 시작된 ‘딩벳 회화(Dingbat)’ 연작이고, 또 다른 하나는 1998년 시작된 ‘색칠 공부 드로잉’ 연작이다. 딩뱃(dingbat)은 “인쇄물에 흔히 쓰이는 형상을 쉽게 문자와 조합할 수 있도록 활자 형태로 제작한 물건”이다. 딩뱃 글꼴(font)을 선택해놓고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면, 각종 약호와 그림문자 등이 문자 대신 타자된다. 박미나는 그렇게 두 가지 상이한 매트릭스(다언어 자판과 여러 벌의 딩뱃)가 중첩되는 양상에 매료된 듯하다. 화가는 (어도비 일러스트레이터를 이용해) 뜻이 있거나 없는 텍스트를 타자해서 얻은 딩뱃을 이리저리 조합해 중층 구조의 다이어그램을 디자인하고, 자신이 수집한 물감에서 추출한 특정한 색상 팔레트를 그 화면에 적용해왔다. 그 도상의 구조와 색상의 조합은, 종종 텍스트와 직설적으로 연관되는 양상을 띠었다. 제목은 언제나, 처음에 입력한 텍스트. 기존의 ‘딩벳 회화’ 연작에서 화가는 색상을 섞는 법이 없었다. 헌데, 2011-2012년의 ‘회색 하늘’ 연작에서 갑자기 작업 양상이 달라졌다. 특수한 조합으로 혼합색을 제조한 작가는, 화면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하나하나 색채를 적용해나갔다. 그가 의도한 것은 이른바 “예쁜 똥색”이란다. 원색을 혼합해 다양한 톤의 회색을 만드는 법을 배웠던 학창 시절을 회고하고 자신을 재훈련하는 뜻이 있었을 터. 작업 순서는 이렇다: 1. 우선 컴퓨터상에서 다이어그램을 구성하고, 다양한 색조의 회색 46가지를 적용한다. 2. 각각의 색상을 구현하기 위한 아크릴 물감의 특수 조합을 생각해내고 일일이 제작했다. 3. (해의 도상을 담은) 색칠 공부 종이에 각 색상을 기록하되 해만은 칠하지 않고 백면으로 비워뒀다. 4. 캔버스 석 장에 다이어그램의 아웃라인을 옮겨 그리고, 화면에 색상을 적용해나갔다. 5. 이 과정에서 예상한 색과 결과물이 크게 다른 경우, 물감을 재조합해 (새 종이와 캔버스에) 재적용했다. ‘회색 하늘’ 연작의 중심이 되는 2012년작 《111122223333444556677888999000AABBFGgJoVvWwx》은 트립티크(삼면화)로, 작가의 표현을 빌면 “우울하게 생긴 딩뱃들”을 모아 구성한 헛서사의 기호학 화면이다. 엉터리 도상해석학을 시도해보면 다음과 같다: “왼쪽 화면에 빙수를 주문한 남녀가 서 있고, 황새가 갓난아이를 물고 날아왔는데, 남자의 생각은 오른쪽을 향하고 있다. 아마도 그에게 중요한 것은 거대한 크기로 배치된 사진기인 모양. 카메라 앞뒤로 강아지, 쇼핑하는 여자, 분실물과 식당의 픽토그램 따위가 배치된 것으로 볼 때, 이는 필경 연애의 세계렷다. 가운데 화면엔, 이 광경을 지켜보다 놀란 로봇(작가의 페르소나?)이 눈을 동그랗게 뜬 채 큰 입을 벌렸고, 물먹은 사람(작가 본인?) 앞으로 심판의 저울이 버티고 섰다. 정의의 상징인 천칭은 다시 엘리베이터에 탑승한 사람들과 화살표로 연결된다. 이는 화가의 인생에 연루된 사람들을 저울질하는 마음 속 심판장인가? 들고나는 인연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짐승은 물오리(작가의 분신?)다. 오리니까, 꽥. 꽥. 꽥. 이 만화경 같은 마음의 생태계는, 다시 수족관으로 유비되고 있다. 하도 물을 많이 먹어서 그런지, 마음속 풍경은 모두 물바다다. 잠수부가 등장하고 물고기가 화면 이곳저곳을 유영한다. 그리고, 기하학적인 꽃무늬(항문?)가 업보처럼 여기저기 피고진다. 삶은 그저 덧없고 무의미하다? 제목도 1, 2, 3, 4, 5, 6, 7, 8, 9를 세고 다시 0을 거쳐 뜻 모를 알파벳으로 마무리 되니, 결국 ‘인생은 공(空), 파멸’이란 소리가 되나?” 이런 멜랑콜리아의 다이어그램에 적용한 색채가, 특정 물감을 섞어 제조한 다양한 회색조니, 당연 ‘인생은 다채롭게 우울하다’는 뜻이다. 이 캔버스 회화가 스킨(skin)이라면, 각 혼합색을 하나씩 기록한 ‘회색 하늘’ 연작의 ‘색칠 공부 드로잉’은 일대일 대응하는 데이터베이스(database)로 기능한다. 기존의 ‘색칠 공부 드로잉’은, 아이들에게 숫자와 언어를 가르치는 색칠 공부 밑그림에 개념적 낙서를 덧그리는, 상당히 자기 유희적인 작업이었다. 하지만, 별도의 세트로 묶이게 된 ‘회색 하늘’의 ‘색칠 공부 드로잉’ 46점은, 스와치의 기능을 떠안게 되면서 본격인 회화 작업의 일부로 복속됐다. 각 낱장의 제목도 단순해져서, 혼합한 색상의 순서에 따른 숫자를 이름으로 삼았다. 그뿐만이 아니다. ‘회색 하늘’ 연작의 ‘색칠 공부 드로잉’엔 곁가지가 하나 있다. 각종 연필―문화 HB에서 톰보우 4B에 이르는―로 태양 바깥의 지면을 까맣게 메워버린 27점이 그것으로, 작가는 이를 ‘진짜 회색 드로잉’으로 상정했다고 전한다. 고로 ‘회색 하늘’ 연작의 요체는, 하나의 스킨과 두 개의 직·간접 데이터베이스로 연결된 개념적 인터페이스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혼종의 양상은, 앞으로 어떻게 자라날까? 여타 작업엔 어떤 영향을 미칠까? 분명한 점은, 이로써 화가가 제 청년기에 이별을 고했다는 사실이다. 과거는 물에 잠겼고, 하늘은 온통 새까만데, 해만 홀로 빛난다. /// 추신) 다음은 ‘회색 하늘’ 연작의 핵심이 되는 46가지 회색 물감의 제조 비법 일부다: 《1》 = Maimeri 404 + Brera 493 Raw Umber + Jo Sonja’s Sapphire + Jo Sonja’s Soft White [...] 《3》 = Maimeri 443 + Golden Mars Yellow + Liquitex Hibiscus + Shinhan 518 Naples Yellow + Maimeri 355 Sky Blue + Jo Sonja’s Galaxy Blue [...] 《9》 = Maimeri 358 Sap green + Jo Sonja’s Vellum + Liquitex Turquoise Green 《9-1》 = Maimeri 443 + Maimeri 356 + Brera 325 + Liquitex Chromium Oxide Green + Brera White + Jo Sonja’s Cashmere + Liquitex Hooker’s Green 《9-2》 = Maimeri 443 + Maimeri 356 + Brera 325 + Liquitex Chromium Oxide Green + Brera White + Jo Sonja’s Cashmere + Liquitex Hooker’s Green + Liquitex Permanent Green Light + Liquitex Turquoise Green [...] 《44》 = Golden Titanate Yellow + Maimeri 323 Yellowish Green + Brera 321 Phthalo Green + Maimeri 052 Brilliant Orange + Jo Sonja’s Wild Rose + Liquitex Hooker’s Green Hue, Permanent + Maimeri 104 Naples Yellow + Liquitex Green Deep Permanent + Liquitex Permanent Green Light + Jo Sonja’s Yellow Green *<퍼블릭아트> 2012년 4월호 게재 원고. **미교열 원고입니다. 퍼옮기지 마시길 부탁합니다. (링크와 RT는 환영합니다.) 도2. ![]() 도3. ![]() 《33》 2011년 색칠 공부 종이에 아크릴릭 33×25.5cm * 《33》 = Maimeri 366 Sky Blue + Brera 340 Permanent Green Deep + Maimeri 050 Orange + Liquitex Red Oxide 도4. ![]() 《1》에서 《9》 《9-1》 《9-2》를 거쳐 《44》까지 2011년 색칠 공부 종이에 아크릴릭 각각 33×25.5cm 총46점 *2012년 박미나 개인전 《회색 하늘》, 뉴욕 두산갤러리 설치 모습 도5. ![]() 《해변에서!-페이퍼메이트 B》(At the Beach!-PAPERMATE B) 2011년 색칠 공부 종이에 연필 33×25.5cm 도6. ![]() 《해변에서! - 페이퍼메이트 B》(At the Beach! - PAPERMATE B)에서 《태양 - 문화 H》(The Sun - Munwha H)까지 2011년 색칠 공부 종이에 연필 각각 33×25.5cm 총27점 *2012년 뉴욕 두산갤러리 설치 모습 도7. ![]() 2012년 05월 01일
[내일의 미술가] 김민애 - 인간과 세상의 접면을 중재하는 조각가
김민애(1981년생)는 일상의 공간을 입체 조형으로 성찰해온 신예 조각가다. 작업의 바탕이 되는 주제는 ‘개인이 세상을 마주할 때 발생하는 충돌과 타협’이다. 최근엔 건축 공간에서 사람들이 간과하기 쉬운 부분들을 다소 뜬금없는 방식으로 연결하거나 지시하는 조각을 만들고 있다. “관객이 경험할 수 있는 어떤 상황”을 연출하는 것이 목표라고 한다. 2011년 학위 청구작 <지붕발끝(Rooftoe)>이 좋은 예다. 영국왕립미술학교 조각과의 스튜디오 겸 갤러리를 고찰한 작가는, 전시장 지붕을 지탱하는 철제 구조물의 형식을 그대로 따르는 외바퀴다리를 제작해 지붕에 덧붙였다. 이렇게 쓸모없는 구조체를 디자인해 실제의 공간에 설치함으로써 얻는 미학적 효과는 뭘까? 일단 기능적 사물(바퀴 달린 다리)의 문법을, 기능하지 못하는 상황에 밀어 넣었으므로, 그 형태와 상징 기능을 색다른 각도에서 다시 보게 된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기능적 사물의 형상이므로, 자연 ‘실제로 기능하는 상황’을 상상하게 된다. 즉, 지붕이 벽에서 떨어져 나와 외바퀴에 의지한 채 수평 이동하는 괴이한 장면을 그리게 된다. 후자에 생각이 미치면, 이 작업은 기능성에 대한 비평에서 썰렁한 농담으로 변한다. 하지만, 이 구조체가 전시장 지붕과 바닥을 실제로 연결하며 ‘갤러리 한가운데 전시되고 있다’는 데로 생각이 뻗어나가면, 이 작업은 미술관 전시 제도를 비평하는 현대미술의 어떤 계보를 지시하는 촌평이 된다. 고로 이 작업은, 적어도 네 종류의 역사적 이슈를 간접 지시한다. 하나는, 기능적 사물의 상징적 인터페이스에 주목해온 ‘비평적 디자인’의 흐름이다. (‘비평적 디자인’은 영국인 디자이너 앤서니 던이 1999년 주창한 새로운 방법론.) 다른 하나는, 실제의 공간에 엉뚱한 기능성을 상정함으로써 새로운 상황을 도출하는 ‘관계적 미학’의 양상이다. (‘관계적 미학’은 프랑스인 비평가 니콜라 부리요가 1998년 주창한 새로운 미술 실천 전략.) 또 다른 하나는, ‘제도 비판 미술’이 공략해온 ‘제도’고, 마지막 하나는, ‘장소 특정적 미술’이 문제 삼아온 ‘장소’다. (소위 ‘제도 비평’은 1970년대의 미술에서 ‘[사회/제도적] 장소 특정성’을 새로운 대주제로 끌어냈고, 이후 ‘장소성’은 1980년대의 포스트모더니즘을 거치며 ‘장소로서의 육체’란 주제와 ‘지역성’이란 주제를 파생시켰다.) 단순한 설치물에 불과한 <지붕발끝>이지만, 요리조리 뜯어보면, 작가가 생각에 생각을 거듭해 고안한 ‘참조적 미술 작품’이라는 점이 분명해진다. 헌데, 이런 다중적 참조성은, 청년 미술가들의 자기 방어적 특색이기도 하다. ‘미래’라는 동력을 잃은 오늘의 미술계에서, 신예가 창의적 작업으로 구세대의 거장들을 압도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일군의 청년 작가들은 ‘과거’와의 적정거리를 확보함으로써 운신의 폭을 확보하려 애쓰고 있다. 죽기를 거부하는 ‘20세기’에 맞서는 조용한 투쟁이 시작된 셈이다. /// 임근준 미술·디자인 평론가 *[조선일보] 2012년 5월 1일자 게재 원고. **미교열 원고입니다. 퍼옮기지 마시길 부탁합니다. (링크와 RT는 환영합니다.) 도판 1. ![]() ![]() <지붕발끝(Rooftoe)> 2011년 철제 뼈대, (카트용) 바퀴 205×20×530cm 도판 2. ![]() 2012년 04월 23일
인간, 워홀
광고 디자이너/일러스트레이터 출신의 현대미술가 앤디 워홀(Andy Warhol, 1928-1987)은, (전업 작가로 데뷔한) 1962년부터 (격동의 해였던) 1968년까지 최전성기를 구가했다. 1987년 2월 22일 일요일, “뉴욕 병원-코넬 메디컬 센터에서 담낭 수술과 페니실린 알레르기 반응으로 인한 합병증으로 사망”하기까지, 극상의 명성을 유지했지만, 그의 빛나던 창의력은 1968년 6월 3일 월요일 흉탄에 맞아 쓰러졌을 때 크게 훼손됐다. 32구경 콜트 자동권총의 방아쇠를 당긴 범인은, 워홀의 개방형 스튜디오 ‘팩토리’에 드나들던 발레리 솔라나스(Valerie Solanas, 1936-1988)였다. “워홀이 내 삶에 너무 큰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 “급진적 페미니스트 레즈비언 문학가” 솔라나스가 밝힌 범행 동기였다. 개복 수술 중 워홀의 심장이 잠시 멈추기도 했지만 기적처럼 살아났다. 하지만, 총격 사건은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심대한 악영향을 미쳤고, 결국 워홀은 낯선 사람을 두려워하는 신경질적인 사람이 됐다. 본디 워홀의 창작력은 상당 부분 팩토리의 개방성에 발 딛고 있었다. 천성적으로 수줍음을 타는 성격이었지만, 수동적 공격성을 바탕으로 사람들을 약 올리고 히스테리 상태에 빠뜨리는 데 일가견이 있었고, 또 다종다양한 사람과 어울리며 관찰하고 도발하기를 즐겼던 터라, 거지에서 학자에 이르는 팩토리 출입자들의 다양한 직업은 종잡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부랑자, 드랙퀸, 창녀, 미술가, 정신병자, 마약중개인, 배우, 모델, 록음악인, 댄스 클럽 문지기, 큐레이터 등이 한데 뒤섞인 팩토리는 그 자체로 하나의 위대한 현대 예술 작품이었다. 워홀은 그들로부터 아이디어를 얻었고, 그들을 주인공/희생양 삼아 작품을 만들었으며, 그들에게 짧고 강렬하되 허무하기 짝이 없는 “15분짜리 명성”을 제공했다. 1963년 뉴욕 맨해튼 47번 스트리트의 동편 231번지(231 East 47th Street)에 있던 옛 소방서 건물에서 문을 연 팩토리는, ‘미국식 민주주의 예술을 생산하는 공장’으로 명성을 날렸다. 그러나, 1968년 1월경 워홀이 유니언스퀘어 서쪽 33번지(33 Union Square West)의 덱커 빌딩 6층으로 작업실을 옮긴 뒤론 전과 같지 않았다. (비고: 팩토리가 처음 입주했던 건물의 벽면은 과거 소방서였기 때문에 은박으로 내화 처리돼 있었고, 그에 맞춰 워홀이 친구인 빌리 네임[Billy Name)에게 부탁해 가구, 엘리베이터 등을 모조리 은색으로 꾸며놓아 사뭇 이색적이었다. 그래서 어떤 평자는 이 시기를 워홀의 ‘은색 시대’라고 일컫는다. 그런데, 워홀이 이후의 작업실도 모두 팩토리라고 명명했으므로, 흔히 오리지널 팩토리는 ‘실버 팩토리’라고 특칭한다.) 죽을 고비를 넘긴 워홀은 아무나하고 어울리지 않았다. 가난뱅이 청년과 사회 부적응자의 자리를 차지한 것은 부잣집 망나니 자제들이었고, 팩토리의 보안은 강화됐다. 공간 자체가 작업실이라기보다 사무실에 가까웠던 탓도 있었겠지만, 이제 워홀을 만나려면 심통 사나운 비서를 통해야만 했다. 고질병인 돈 욕심도 더 심해졌는지, 1970년대 내내 사교계를 누비는 명사들과 과시욕에 넘치는 졸부들의 초상화를 대거 수주·제작했다. 1979년 휘트니미국미술관에서 <앤디 워홀: 1970년대의 초상(Andy Warhol: Portraits of the 1970s)>전을 개막했을 때, 미술계엔 워홀의 미술사적 가치를 폄하하는 분위기가 팽배했다. 1972년 모친이 세상을 뜬 이후, 워홀은 더욱 교활하고 인색하며 냉정한 면모를 드러냈다. 드라큘라와 신데렐라를 뒤섞어 만든 ‘드렐라(Drella)’라는 괴상한 별명까지 얻었다. 하지만, 당시 워홀에게 쏟아진 세인의 곱지 않은 시선은, 어느 정도 1970년대 특유의 흥청망청한 분위기 탓이기도 했다. 1969년 6월의 스톤월 혁명 이후 새로이 발흥한 뉴욕의 게이하위문화에 매료된 동성애자 워홀은, 게이 포르노풍의 3류 영화를 제작하며 캠프 미학의 전성기를 선도했다. 특히 1977년 문을 연 전설의 디스코클럽 ‘스튜디오 54(Studio 54)’에서 파티를 주최하며 새로이 등장하는 청년 예술가들에게 직·간접적으로 힘을 행사하는 모습은, 그리 윤리적으로 반듯한 풍경은 못됐다. 게다가 1980년대와 함께 등장한 ‘게이의 암’--1982년 중반에야 AIDS(후천성면역결핍증)로 정식 명명되는--은 미국사회 전반에 암운을 드리웠고, 워홀의 삶도 AIDS 대위기의 시대를 맞아 크게 흔들렸다. (인터넷 보급 이전 시대의 많은 게이들이 그랬듯) 워홀은 전화에 남달리 집착했다. 1975년경 미국 국세청에 탈세 의혹을 사 고생을 한 그는, 매일 아침 그 전날의 지출 사항을 전화로 대필 작가 팻 해켓(Pat Hackett)에게 읊기 시작했다. 그러면 해켓은 그것을 녹음하고 받아 적어 소비 기록을 작성했으며, 이는 워홀의 연말 정산 자료로 요긴하게 활용됐다. 이런 방법에 흥미를 느낀 워홀은, 아예 전화 일기를 쓰기로 작정했다. 해켓에게 전화를 걸어 하루의 일과를 노닥거리면 끝. 그러면 헤켓은 녹음된 통화를 일지 형식으로 정리했다. 그 결과물이 <앤디 워홀 일기(The Andy Warhol’s Diaries)>로, 1976년 11월 24일부터 1987년 2월 17까지의 일상을 고스란히 담았다. 시답잖은 트리비아가 대부분이지만, 당대의 공포를 드러내는 행간에선 날선 현실감이 도드라지기도 한다. “음, 너무 걱정된다. 내가 아무것도 안 해도 ‘게이의 암’에 걸릴 수 있다.” - 1982년 9월 18일 토요일 “뉴스는 온통 파리의 록 허드슨이 AIDS에 걸렸다는 소식으로 도배됐다. 사람들은 이제 그가 동성애자였다는 사실을 믿을 것 같다. 예전에는 그 얘기를 아무도 믿지 않았다.” - 1985년 7월 23일 화요일 자신도 AIDS에 걸렸을까봐 몹시 두려워했던 워홀은, 1987년 의문의 의료 사고로 세상을 떴다. 폐에 물이 차서 죽었기 때문에, 예술계의 데카당들은 “멀쩡히 병상에 누운 채 익사했다”며 농을 했다. 만우절이었던 1987년 4월 1일 뉴욕 성패트릭대성당에서 열린 워홀의 추도 미사에 참석한 명사들의 사진을 보면, 환하게 웃는 모습이 태반이다. (비고: 워홀의 사망 당시 직업적 책임을 다하지 않았다고 지목됐던 문제의 간호사는 한국계인 조모[Min Cho]씨.) 거의 ‘야생동물의 본능’에 가까운 직관력으로 시대를 앞섰던 워홀이었지만, 그의 진짜 정체성은 언제나 (부유한 도시인의 삶을 동경하는 동시에 경멸하는) 시골 게이 소년의 그것이었다. 그가 제 성장 배경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던 까닭은, 부친의 때 이른 죽음과 그로 인해 내려진 가족의 투자 결정 때문이었던 듯싶다. 1928년 8월 6일 미국 피츠버그의 노동자 마을에서 앤드류 워홀라(Andrew Warhola)로 태어난 워홀은, 어려서부터 유달리 명민했던 모양. 1942년 복막염으로 사망하게 된 그의 아버지는 ‘그간 우체국 저축 공채로 저축해놓은 1,500 달러 모두를 넷째 아들인 앤드류의 교육비로 사용하라’고 유언을 남겼고, 형제 가운데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특히 불과 3살 연상이었던 존 워홀라(John Warhola)는 거의 아버지 노릇을 하며 동생을 보살폈고, 힘겹게 돈을 벌어 학비를 보탰다. 워홀은 성공을 거둔 뒤에도 거의 매일 셋째 형 존과 전화 통화했을 만큼, 정서적으로 그에게 크게 의존했다. 인간, 워홀의 또 다른 면모다. “나는 아직도 사람들을 신경 쓰지만, 상관하지 않는 편이 훨씬 편할 테다. 난 너무 가까운 관계를 바라지 않고, 또 뭘 만지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내 작품이 나 자신과 영 동떨어진 건 그런 까닭이다(I still care about people but it would be so much easier not to care. I don't want to get too close: I don't like to touch things, that's why my work is so distant from myself).” /// 임근준 AKA 이정우 _ 미술·디자인 평론가, 홍익대 BK연구원 *<비욘드> 2012년 2월호 게재 원고. **미교열 원고입니다. 퍼옮기지 마시길 부탁합니다. ![]() ![]() ![]() 2012년 04월 05일
도판 1.
![]() <무제(완벽한 연인들)(Untitled[Perfect Lovers])> 1991년 두 개의 벽시계, 벽면에 페인트칠 35.6 x 71.2 x 7 cm [임근준의 20·21세기 미술 걸작선: ‘이름 프로젝트’ VS 펠릭스 곤잘레즈-토레스] 펠릭스 곤잘레즈-토레스의 《무제(완벽한 연인들)》 펠릭스 곤잘레즈-토레스(Félix González-Torres, 1957-1996)는, 에이즈 위기 시대의 뉴욕 현대예술계를 대표하는 미술가로 꼽힌다. 그의 작업 특징은, 개념미술의 어법과 미니멀리즘의 형식을 차용해 지극히 개인적인 일화(대개 연인에 관한 추억)를 숨기고, 그것을 전시하고 해석하는 과정이 정치적 비평이나 성찰이 되도록 꾸미는 데 있다. 전선으로 이어진 전구, 스냅 사진을 인쇄한 퍼즐, 한 쌍의 벽시계/거울/커튼, 바닥에 쏟아놓은 알사탕, 끝없이 제공되는 인쇄물의 더미, 반짝이 구슬 장식 커튼, 모호한 이미지나 연보를 담은 옥외 광고판 등, 작업의 물리적 외형도 단출했다. 쿠바 태생의 동성애자였던 곤잘레즈-토레스는, 1991년 8년의 시간을 함께한 연인 로스 레이콕(Ross Laycock, 1959-1991)이 에이즈 진단 3년 만에 합병증으로 사망하자, 애틋한 연정의 기념비인 《무제(완벽한 연인들)(Untitled[Perfect Lovers])》(1987-1990)의 또 다른 버전을 제작했다. 달라진 것은 색상이었다. 세스 토머스(Seth Thomas)사가 제조한 백색의 원형 벽시계를 동일한 제품으로 두 개 구매한 작가는, 새 건전지를 넣고 시간을 맞춘 뒤 옅은 청색의 벽면에 나란히 부착했다. 감정 표현을 절제한 듯 뵈는 간단한 설치 작업이었지만, 그 울림은 남달랐다. 동일한 원형의 구조가 좌우로 나란히 서로를 접한 모습은, 남성 동성애의 추상적 상징 혹은 기호적 등가물로 독해되기에 모자람이 없었고, 약간의 시간차를 드러내는 붉은 초침이 동일한 시각을 좇는 모습은 죽어가는 중환자가 느꼈을 죽음의 공포를 효과적으로 환유했다. ‘작품을 만들 때 염두에 두는 제1의 관객이 누구냐’는 질문에 늘 “로스”라고 답했던 작가는, “아름다운 추억에 색이 있다면, 그건 옅은 청색일 테다”라는 첨언으로 특정 색상에 사적인 정조를 덧댔다. “완벽한 연인들”이라는 부제도 이 쌍둥이 시계에 멜랑콜리한 감정을 투사하는 언어 장치다. 일심동체로 분초를 함께하니, 분명 이 창백한 한 쌍의 시계는 ‘완벽한 연인’으로 호명되기에 적절하지만, 어느 쪽이 먼저 멈출지 알 수 없다. 1988년 레이콕이 먼저 에이즈 증세를 보였고, 곤잘레즈-토레스도 곧이어 HIV 감염 진단을 받았다. 당시 두려움에 사로잡힌 동반자를 위로하기 위해 작가는 애틋한 연서를 썼는데, 다음이 그 문구다: “연인들, 1988년 / 시계들을 두려워하지 말아요, 그게 우리의 시간이고, 언제나 시간은 우리에게 너그러웠죠. 우리는 승리의 달콤한 맛을 시간에 아로새겨왔습니다. 우리는 특정 공간과 특정 ‘시간’에 만나 운명을 정복했어요. 우리는 그 시간의 산물이기에, 때(시간)가 되면 마땅히 되갚아야 합니다. / 우리는 시간을 함께하도록 맞춰졌답니다, 지금 그리고 또 영원히. / 당신을 사랑해요.” 타이프라이터로 작성한 편지에서 눈길을 사로잡는 것은, 청색 펜으로 그려 넣은 한 쌍의 원형 벽시계로, 둘 다 대략 12시 50분을 가리키고 있다. 레이콕이 세상을 뜨고 삼 주 뒤, 곤잘레즈-토레스는 연인의 분골을 백 장의 노란 봉투에 나눠 담았다. 그게 마지막 유언이었다고 전한다. 상실감을 이기기 위해 고양이 네 마리와 함께 새 아파트로 이사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병세도 악화됐고, 고인을 그리워하는 작품을 연이어 제작했다. 《무제(로스)》(1991)는, 집안 한 귀퉁이에 쌓아 놓은 사탕더미로, 관람하는 누구나 색색의 셀로판지로 포장된 사탕을 가져갈 수 있지만, 약79kg의 무게를 유지하도록 명시된 작품이다. 전시 기간 내내 적잖은 양의 사탕이 사라지고, 또 남은 사탕 또한 습기를 잃어 점차 가벼워진다. 따라서, 레이콕의 ‘정상 체중’과 동일한 무게를 유지하기 위해, 전시 담당자들은 매일매일 사탕을 쓸어 담고 무게를 측정하고 보충하는 작업을 반복해야 한다. 반면 《무제(3월 5일)》(1991)는, 한 쌍의 원형 거울을 벽면에 좌우로 나란히 맞대어 부착한 작품으로, 부제에 명시된 날짜는 레이콕의 생일이다. 1995년 병세가 심각해지자, 곤잘레즈-토레스는 화상 패트릭 페인터에게 지름 41.91cm 크기의 은환을 서른두 개 제작하라고 주문했다. 한 쌍을 좌우로 나란히 맞대어 벽면에 부착하는 형식은 그대로 유지됐고, 제목은 《무제(Untitled)》였다. “내가 만든 조각 가운데 항구적 형태를 지닌 유일한 작품”이라는 말도 덧붙였는데, 마지막으로 세상에 남기는 사랑의 기념비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비고: 레이콕이 세상을 떠난 1991년, 작가는 한 점에서 마주 닿은 같은 크기의 원 두 개를 담은 포스터를 제작해 바닥에 쌓아놓고 《무제(이중의 초상)(Untitled[Doble Portrait])》라고 이름을 붙인 바 있다.) 연인을 저승으로 떠나보낸 지 5년째 되던 1996년 1월 9일, 그도 불귀의 객이 됐다. 고인의 나이, 불과 38세였다. 1957년 쿠바 과이마로에서 태어난 곤잘레즈-토레스는, 1971년 부모를 떠나 푸에르토리코의 삼촌 곁에서 성장했다. 푸에르토리코대학교에서 미술을 전공한 뒤 1979년 뉴욕으로 이주해 프랫인스티튜트에서 인테리어디자인을 공부했고, 1983년 졸업식을 치른 뒤 (1986년 동거인이 될) 레이콕을 처음 만났다. 1987년 NYU와 국제사진센터에서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1987년 에이즈 위기의 정치적 함의를 다루는 미술가 집단 ‘그룹 머티리얼’에 참여해 1989년 《에이즈 연보(AIDS Timeline)》를 공동 제작했고, 이후 시대의 유행에서 동떨어진 걸작을 연이어 발표하기 시작했다. [...] 사후 10년만인 2007년 제52회 베니스비엔날레의 미국관(커미셔너: 낸시 스펙터, 구겐하임미술관 학예실장)은 그를 대표 작가로 선정해 다소 어색한 개인전을 선뵀고, 2012년 6월 삼성미술관 플라토는 아시아 최초로 그의 회고전을 개최할 예정이다. 에이즈에 걸린 동성애자 미술가를 핍박하던 시절은, 과연 이렇게 역사의 저편으로 사라지는 것일까? /// 추신) 1995년 죽음을 예감한 작가는 마지막으로 연보 형태의 자화상 작업인 《무제(Untitled)》를 정리·제작했는데, 옮기면 다음과 같다: “빨간 카누 1987 수채화 1964 파리 1985 미 연방 대법원 1986 블루 레이크 1986 우리만의 아파트 1976 로사 1977 과이마로 1957 뉴욕시 1979 페블스와 비코 1985 로스 1983 시민권 운동 1964 마리엘 선박 탈출 1980 백색 셔츠 1984 줄리 1987 안락사 1991 CNN 1980 검은 월요일 1987 베를린 장벽 1989 위대한 사회 1964 베니스 1985 와와네사 호수 1987 U.N. 1945 어머니 1986 미리엄 1990 VCR 1978 아빠 1991 피그만 침공 1961 D-데이 1944 인터페론 1989 제프 1978 은빛 대양 1990 수소폭탄 1954 내가 알던 세상이 사라지다 1991 브루노와 매리 1991 마드리드 1971 MTV 1981 라파엘 1992 5월 1968 안드레아 1990 24번가 1993 L.A. 1990 위약 효과 1991 조지 넬슨 시계 1993 기억에 남을 전경 1995.” *<퍼블릭아트> 2012년 3월호 게재 원고. **미교열 원고입니다. 퍼옮기지 마시길 부탁합니다. (링크와 RT는 환영합니다.) 도판 2. ![]() 도판 3. ![]() <무제(완벽한 연인들)(Untitled[Perfect Lovers])> 1987-1990년 두 개의 벽시계 34.3 x 68.6 x 3.2 cm *작품 구상은 1987년이라고 하지만, 처음 전시된 것은 1990년의 일. 도판 4. ![]() <무제(완벽한 연인들)(Untitled[Perfect Lovers])> 1987-1990년 두 개의 벽시계 34.3 x 68.6 x 3.2 cm 3점의 에디션, 1점의 A.P. *1994년 <펠릭스 곤잘레즈-토레스: 여행하기>전을 위해 시카고대학 르네상스소사이어티의 학예실에 설치한 모습. 도판 5. ![]() <무제(Untitled)> 1995년 은도금한 황동 41.91 x 83.82 cm (지름 41.91cm) 12점의 에디션, 4점의 A.P. 2012년 04월 05일
도판 1.
![]() [임근준의 20·21세기 미술 걸작선: ‘이름 프로젝트’ VS 펠릭스 곤잘레즈-토레스] ‘이름 프로젝트’의 《에이즈 추모 퀼트》 냉전이 막바지에 달했던 1980년대는 에이즈가 세계를 위협했던 시기였다. 1978년 미국과 스웨덴의 일부 게이 청년들을 쓰러뜨리기 시작한 미지의 괴질환은, 1981년 ‘게이의 암(gay cancer)’이라는 몹쓸 이름을 얻었다. 1981년 미국에서만 234명이 면역 기능 저하로 사망했는데, 대부분이 백인 동성애자 청년이었던 탓이다. 동성애자들을 정치적으로 결속하게 만든 스톤월 봉기가 1969년의 일이었으니, 불과 10년 만에 맞은 절체절명의 위기였다. 1982년 1월 공포에 질린 동성애자들은 이름 없는 질병에 맞서고 죽어가는 형제들을 돌보기 위해 자구 조직을 꾸렸다. 이름 하여, ‘남성 동성애자의 건강 위기(Gay Men's Health Crisis)’. 지금 들으면 다소 우스꽝스런 이름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원인불명의 집단적 죽음에 맞선 첫 단체였다는 점을 상기하기 바란다. 사태가 악화일로에 접어들자, 국제 사회도 크게 동요하기 시작했다. 《조선일보》 1982년 7월 20일자에 게재된 “《움직이는 세계》 미국 등에 미지의 괴질 크게 번져”란 기사가 한국에선 첫 관련 보도였다. 그러나, 젊은이들을 죽음으로 몰아가는 이 질병엔, 아직 제대로 된 이름조차 없었다. 정체불명의 병환에 정식으로 이름을 붙이는 일은, 미국 질병관리본부(CDC: Centers for Disease Control and Prevention)의 몫이었다. 1982년 7월 27일 ‘게이의 암’은 후천성면역결핍증(AIDS: acquired immune dificiency syndrome)으로 명명됐다. 이렇게 호명된 적의 정체가 드러난 것은 이듬해인 1983년의 일로, 프랑스 파스퇴르연구소의 뤽 몽타니에(Luc Montanier)와 그의 조수 프랑수아 바레-시누시(Francoise Barre-Sinoussi)가 미지의 바이러스를 최초로 발견했다. 하지만, 이 바이러스가 에이즈의 원인이라는 사실을 규명한 장본인은, 미국의 과학자 로버트 갈로(Robert Gallo)였다. 그러니까, 인간면역결핍 바이러스(HIV: Human Immunodeficiency Virus)가 후천성면역결핍증을 야기한다는 과학적 사실이 공표된 시점은, 갈로의 논문을 게재한 《사이언스》지가 출간된 1984년 5월 4일이었다. 하지만, 이런 의학적 진전이 곧바로 위기에 처한 동성애자공동체를 구원한 것은 아니었다. 1983년 미국의 보수주의 목사 제리 팔웰(Jerry Falwell)이 “에이즈는 게이에게 내려진 신의 형벌”이라고 주장하기 시작한 이래, 주류 사회의 동성애자 차별은 노골화됐다. 사망자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었지만, 미 대통령 로널드 레이건은 1985년에 이르러서야 공식석상에서 에이즈 위기를 언급했다. (비고: 1985년은 한국에서 첫 에이즈 환자가 보고된 해이기도 했다.) 레이건이 에이즈 문제에 관한 첫 연설을 행하고, 에이즈를 “제1순위의 공공의 적(public enemy number one)”으로 규정한 때는 1986년, FDA가 새로운 항바이러스제제인 AZT(Zidovudine)를 승인하고, 미 정부가 HIV보균자의 이민과 입국을 금지한 이후의 일이었다. (비고: 2012년 현재 문명국가 가운데 HIV보균자의 출·입국을 규제하는 나라는 존재하지 않는다.) 에이즈의 공포가 전지구를 뒤흔드는 가운데, HIV에 감염된 동성애자들은 사회의 핍박과 냉대 속에 쓸쓸히 죽어갔다. 가족에게조차 버림받은 채 죽음을 맞은 다수의 동성애자들은, 대개 장례식도 없이 화장됐으며 변변한 무덤을 얻지 못했다. 처량하기 짝이 없는 대명천지의 떼죽음이었다. 따라서 일군의 미술가들은 에이즈와 HIV 감염자 사회에 마땅한 가시성을 부여하려 애썼다. 앞장선 것은 전투적인 운동가들이었다. 1986년 활동을 개시한 ‘침묵=죽음 프로젝트(Silence = Death Project)’는 나치가 동성애자에게 부여했던 분홍색 역삼각형을 바로 세워 에이즈 시대의 동성애자 인권의 표상으로 삼았고, “침묵은 죽음이다”를 구호로 외치며 레이건 정부의 미온적 대응을 “동성애자 학살”로 규정하고 나섰다. 이후 에이즈 프로파간다 투쟁은 에이즈 위기의 정치적 함의를 폭로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주역은 ‘그룹 머티리얼(Group Material)’과 ‘그랜 퓨어리(Gran Fury)’ 그리고 ‘제너럴 아이디어(General Idea)’였다. 하지만, 대중의 마음을 크게 움직인 프로파간다는 ‘이름 프로젝트(NAMES Project)’의 《에이즈 추모 퀼트(AIDS Memorial Quilt)》였다. 에이즈로 가족과 친구와 연인을 잃은 이들이 손바느질로 꾸민 높이 3인치 폭 6인치 크기의 퀼트 패널로 고인을 애도하는 방식은, 희생자들에게 인격을 되돌려줬고, 보는 이들에게 조용하지만 힘 있는 항거와 시위로 작용했다. 1987년 미 워싱턴의 내셔널몰(미 국회의사당과 링컨 대통령 기념관 사이의 녹지 광장)에 처음으로 한데 펼쳐진 1,920장의 추모 퀼트는, 에이즈 희생자들의 소외된 죽음에 일시적이나마 추모의 공간을 제공해 전국적인 동정 여론을 이끌었다. 축구 경기장보다 조금 더 큰 면적을 가득 메운 추모 퀼트는, 처음으로 에이즈로 인한 죽음에 합당한 숭고와 비애를 부여했다. 자연 추모객의 발길이 이어졌고, 일주일 만에 방문자는 50만 명을 기록했다. 이후 《에이즈 추모 퀼트》는 자발적 참여가 이어지는 대규모 사회 운동으로 성장했다. 1988년 봄 미국 전역의 20개 도시를 순회했고, 50만 달러의 에이즈 기금이 모였다. 7명의 순회 전시팀을 도와 9천명의 자원봉사자들이 전시 설치를 도왔고, 1차 순회전시가 마무리될 무렵 퀼트의 수는 6,000장을 돌파했다. 이해 10월 8,288장의 《에이즈 추모 퀼트》가 백악관 앞에 펼쳐졌고, 유명인사, 정치인, 운동가, 유족 등이 마이크 앞에 서서 퀼트의 주인공들을 차례차례 호명했다. 희생자 이름 부르기는 이후 《에이즈 추모 퀼트》의 전통으로 자리 잡았다. 《에이즈 추모 퀼트》 운동의 정점은 1992년이었다. 북미 전역은 물론 세계 27개국에서 퀼트를 보내왔고, 워싱턴 오벨리스크 앞 녹지 광장에서의 전시는 국제 언론으로부터 큰 주목을 받았다. 1993년 ‘이름 프로젝트’는 빌 클린턴 대통령의 취임 행진에 공식 초대됐는데, 이는 정부와 에이즈 단체의 갈등이 협력으로 전환됨을 알리는 작은 신호탄이었다. 《에이즈 추모 퀼트》를 총집합한 전시는 1996년이 마지막이었는데, 워싱턴의 내셔널몰을 가득 메운 4만 여장의 퀼트는 시각적 경이 그 자체였다. 3일간의 전시에 120만 명이 참배했고, 미 대통령과 부통령도 추모에 동참했다. 축구장 24개에 해당하는 면적을 뒤덮은 《에이즈 추모 퀼트》는 국제 여론을 움직였고, 1996년을 기점으로 에이즈 환자와 HIV 보균자에 냉혹했던 대중의 인식은 점차 누그러지기 시작했다. 이러한 국면의 전환은, 1995년 도입된 ‘칵테일 요법(2-4가지 항바이러스 제제를 동시에 투약하는 병행 요법)’이 에이즈 환자의 조기 사망률을 크게 낮춘 덕이기도 했다. 《에이즈 추모 퀼트》를 시작한 인물은, 샌프란시스코의 동성애자인권운동가 클리브 존스(Cleve Jones, 1954-)였다. 1985년 그는 전설적 게이인권운동가였던 하비 밀크를 기리는 연례 행진에서 에이즈로 사망한 이들의 이름을 적은 푯말을 들자고 제안했는데, 퍼레이드를 마친 뒤 모든 이름표를 샌프란시스코 시청사 건물 벽면에 테이프로 이어붙이면서 추모 퀼트 제작의 아이디어를 얻었다. 이듬해인 1986년 친구였던 마빈 펠드먼을 기리는 퀼트를 처음 제작했고, 1987년 6월 마이크 제임스 등 동료들과 함께 ‘이름 프로젝트 재단(The NAMES Project Foundation, Inc.)’을 출범시켰다. /// 추신) 에이즈와 에이즈 희생자에 대한 편견을 깨뜨린 ‘이름 프로젝트’의 《에이즈 추모 퀼트》는 다음과 같은 결산 기록을 남겼다: 9만1천명 이상의 희생자 이름을 담은 4만5천 장 이상의 퀼트가 아카이브에 모였고, 그 총면적은 만 평방미터를 넘어섰으며, 총 천8백만 명의 추모객이 참배했고, 4백만 달러 이상의 에이즈 기금이 조성됐다. 추신2) 한국의 HIV감염자의 주요 사망 원인은 에이즈 합병증이 아닌 자살이다. *<퍼블릭아트> 2012년 3월호 게재 원고. **미교열 원고입니다. 퍼옮기지 마시길 부탁합니다. (링크와 RT는 환영합니다.) 도판 2. ![]() 도판 3. ![]() 도판 4. ![]() 도판 5. ![]() 2012년 04월 03일
![]() [에이트] 임근준의 ‘오늘의 미술이 말하는 법’ : 열쇳말로 살펴보는 현대미술문법 14강 “현대미술의 기초 문법을 배우면, 막혔던 눈과 귀가 열린다.” 01. 양차대전 사이의 추상 - 자연의 추상에서 탈자연의 추상으로 _ 4월 3일 02. 전후의 추상 - 부재의 추상에서 과정의 추상으로 _ 4월 10일 03. 광기 - 비이성적 에너지를 창작의 원천으로 삼기 _ 4월 17일 04. 말장난 - 언어로 조형을 유희하기 _ 4월 24일 05. 색상 - 감성적 상징에서 비주관적 탐구의 대상으로 _ 5월 1일 06. 사진 - 사진술을 활용하는 다양한 현대적 방법 _ 5월 8일 07. 수집과 조사연구 - 유사 과학적 방법으로 작품을 귀결 짓기 _ 5월 15일 08. 비기념비 - 기념비를 반대함으로써 또 다른 기념비를 세우기 _ 5월 22일 09. 제도 비평과 장소 특정성 - 미술 전시의 조건을 작품의 일부로 삼기 _ 5월 29일 10. 전유 혹은 도둑질 - 재능은 빌리고, 천재는 훔친다 _ 6월 5일 11. 미술가의 몸 - 에고의 성전을 부리는 예술적 방법 _ 6월 12일 12. 비미술적 재료 - 자전거 바퀴에서 인공위성까지 _ 6월 19일 13. (상징 형식으로서의) 인터페이스 - 제품의 형식으로 사용자 마인드에 소구하기 _ 6월 26일 14. 피처링, 포스트-프로덕션, 매시업 - 예상한 것 이상의 결과를 도출하는 방법 _ 7월 3일 _ 강의 소개 ‘현대미술이 전시된 갤러리를 찾으면 알게 모르게 주눅이 들어요-’라고 말씀하는 분들이 적잖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현대미술을 이해하기가 그리 쉽지만은 않기 때문이죠. 하지만, 불가해한 듯 뵈는 현대미술품 앞에서 세련된 척하며 폼을 잡는 사람들을 보고 “나만 이해를 못하나…, 내 눈에만 안 뵈는 뭔가가 있나…”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랍니다. 문제적인 작품은 미술계 관계자들도 전연 이해를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큐레이터조차 자신이 기획한 전시의 작품을 하나하나 다 꿰고 있지는 못합니다. 그렇다고 작가가 직접 나서서 작품을 해설하면 곤란합니다. 그러면, 작품이 말할 기회를 작가가 빼앗는 꼴이 되고 말거든요. 그러니, 말이 없는 작품을 가운데 놓고, 작가는 작가대로 힘들고, 관객은 관객대로 힘이 드는 형국입니다. (중간에 나서서 작품 해설을 도맡은 도슨트의 설명은 영 신뢰가 가지 않고요.) 현대미술이란 상상의 공동체는 세상을 보는 방법을 놓고 다투는 격전장에 다름 아닙니다. 고로 작가들이 골머리를 썩어가며 찾아낸 새로운 ‘보는 방법’이 단박에 이해될 턱이 없죠. 현대미술을 쉽게 이해하는 지름길이 있을까요? 아쉽게도, 왕도는 없습니다. 시대의 집단 지성이 흘러가는 조류를 쫓아 열심히 공부하는 수밖에요. 어떤 분은 묻더군요, “서양미술사를 소개하는 교양·입문서들을 읽어보면, 이해하기에 그리 어렵지 않은데, 왜 현대미술엔 그런 책이 드문가요?” 듣고 보니 그렇더군요. 아마도, 그런 교양서를 쓰기 어렵기 때문일 겁니다. 르네상스 이후의 원근법 회화를 분석하고 기술하는 방법은 잘 정리돼있습니다. 천재 미술사학자 에르빈 파노프스키(Erwin Panofsky)가 제시한 도상해석학(iconography)이 대표적입니다. 추상미술운동 이전의 회화사는 그가 갈무리한 방법론으로 관통이 가능합니다. 도상해석학에 기반을 둔 채 진척된 학술연구의 성과도 상당하죠. 대중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문장으로 꾸며진 교양·입문서는 그런 토대 위에서나 가능합니다. 그런데, 현대미술은 구상회화조차 도상해석학으로는 해석이 되지 않는 경우가 태반입니다. 그렇다고 현대미술사를 연구하는 새로운 방법론이 확립된 것도 아닙니다. (논문을 쓰는 사람들마다 방법론이 제각각입니다.) 게다가, 1945년 이후의 현대미술에 관해선, 아직도 주요 작가들이 생존해 있기 때문에, 학위 논문이 잘 나오지 않습니다. (살아있는 사람은 자신에 관한 논문에 어떤 식으로든 간섭을 하기 마련이지 않겠어요?) 그러니 독보적 권위를 얻은 현대미술사 저작이 아직 없습니다. 정전(canon)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게다가 1960년대 후반 이후 지성계의 흐름은 정전을 쓰는 일을 터부시했기 때문에, 아예 시도조차 하지 않는 분위기입니다. 토대가 아직 빈약하니, 교양·입문서도 실하기 어렵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좋을까요? 묘수가 없을까 고민하다 보니, 현대미술가들이 구사하는 시각언어를 쉽게 해설해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르네상스의 화가들이 원근법을 활용해 공간을 구성하고 그에 이러저러한 사물과 인물을 상징적으로 배치해 관객에게 이야기를 걸었다면, 오늘의 작가들은 저마다의 방법을 개발해 관객에게 이야기를 겁니다. 방법론이 제각각이다보니, 현대미술의 난해함은 가중되고, 글쓰기도 더욱 어려워집니다. 현대미술 작품 하나를 놓고도 해석이 분분하기 일쑤인 터라, 대개의 평자들은 문제적 작품을 구체적 언어로 해설하기 꺼립니다. (훗날 자신의 해석이 틀렸거나 편협했음이 드러나면 난처하기 때문이죠.) 상황이 이러하니, 역시 최선의 방도는 작가들이 고안해낸 제각각의 조형언어를 종류별로 갈무리하고 그 대표작을 그에 맞춰 쉬운 말로 해석해보는 일입니다. 그러면, 작품을 보는 눈도 생기도, 이해도도 높아지지 않겠습니까? (기본 문법을 터득하면, 독해가 되기 시작하듯이.) 그래서, 이 연강의 제목은 “오늘의 미술이 말하는 법”입니다. 자, 앞으로 ‘오늘의 미술이 말하는 법’ 가운데 무엇을 어떻게 강설하면 좋을지 한번 정리해봤습니다. 강의가 진행되면서 계획이 변경될 수도 있겠지만, 현재 예상하는 바는 이렇습니다: 제1강과 제2강에선 현대미술의 기본인 추상미술을 공부합니다. 추상미술은 크게 두 갈래로 나눠 볼 수 있습니다. 우선, 중고등학교 미술 교과서에 나오듯, 구상에서 출발해 반추상을 거쳐 추상에 도달한 것이 바로 한 가지입니다. 그런데 그것도 대상을 추상화하다보니 점차 과정을 추상화하는 단계로 전환됩니다. 그러다가 아예 관조의 대상으로서의 추상이 아니라, 물질 그 자체, 그러니까 그림과 조각이 되는 물적 토대만 남기고 나머지 환영의 요소는 모두 제거해 버린 새로운 추상이 등장합니다. 그것이 바로 미국의 미니멀리즘 미술입니다. [...] 저는 추상을 ‘얼음지옥’이라고 표현하곤 합니다. 통과하기 무척 어렵지만, 일단 통과하면 나머지 현대미술을 이해하기가 쉬워집니다. (‘얼음지옥’ 너머엔 후끈한 ‘정글’의 동시대가 여러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반대로, 추상을 이해하지 못하면, 현대미술은 요해불가(了解不可)의 것이 되고 말죠. 시간이 허락한다면 말미에 오늘의 추상도 살펴볼 생각입니다. 한때는 미니멀리즘 이후 더 이상 추상미술이 갈 곳은 없을 것 같았고, 또 그에 반발하며 신구상회화와 설치미술이 새로운 주류로 떠올랐기 때문에, 여전히 추상 미술이 유효한 의제(agenda)라는 사실을 잘 모르는 분들이 많더군요. 심지어 미술학교에서 회화를 전공하는 학생들도 잘 알지 못합니다. 요즘의 새로운 추상화가들은 가상적 회화 공간을 설정하고, 그 속에서 자가생성하는 추상의 질서를 탐구하는 것이 특징이죠. 제3강에선 광기를 다루는 방법을 보겠습니다. 광기는 이성을 넘어서는 힘의 원천입니다. 정신병자의 그림에서 한수 배운 작가가 있는가 하면, 스스로를 극한으로 몰아붙여 반쯤 미쳐버린 작가도 있고, 미치지는 않았지만 미친 짓에 가까운 행위를 시도함으로써 남다른 넌센스와 아이러니를 구현한 작가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광인의 이미지를 지닌 예술가의 전형은 언제 어떻게 등장했을까요? 제4강에선 말장난의 방법을 공부하겠습니다. 많은 작가들이 언어유희로 비언어적 조형의 차원을 가지고 놀기를 꿈꿨습니다. 또한 조형과 언어의 일상적 관계를 비틀어 새로운 돌파구를 찾기도 했습니다. 단순한 제목의 말장난에서부터, 언어로 창작 행위를 규제하는 다양한 방법, 그리고 ‘언어에 연루된 오브제를 언어에 종속시키지 않은 채 다른 차원의 오브제로 전환시킴으로써 궁극의 조형적 쾌락을 추구하는 법’ 등에 이르는 다채로운 말장난의 메소드를 소개합니다. 제5강에선 색상을 다루는 법을 배워보겠습니다. 중·고교 미술 교과서에서 ‘형태는 논리적인 것이고, 색채는 감성적인 것’이라고 가르칩니다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또 얼치기 색채심리학 때문에, ‘색채는 비물질적인 것으로서 우리의 무의식에 연루된다’는 식으로 이해하는 분들도 적지 않습니다. 그것도 진실은 아닙니다. 모든 색채는 물질의 형태로 존재합니다. 심지어 인공물의 색채는 레디메이드입니다. 공장에서 미리 만들어 놓은 색상의 체계는 유행과 생산 조건에 따라 지속적으로 변화합니다. 따라서 현대미술가들은 감성을 표출하는 도구로 색채를 이용하는 것 외의 다양한 방법으로 색상의 실존을 다뤄왔습니다. 행위를 기록하는 코드로 이용한 사람도 있고, 색상 그 자체를 탐구하는 도구로 색상을 이용한 작가도 있습니다. 제6강은 사진을 활용하는 다양한 현대적 방법을 이야기할 차례입니다. 사진은 다른 전통적 매체와 달리 여러 매체를 통해 존재하는 특성이 있습니다. 보관을 할 때도 필름이 원본인지, 프린트가 원본인지, 스캔한 데이터가 원본인지 도통 알 길이 없죠. 그러한 특성 때문에 사진은 개념미술가들에 의해 각광 받았습니다. 매체에 귀속되지 않는 미술 작품을 만드는 데 아주 적절했거든요. 사진은 행위와 퍼포먼스 등의 기록으로도 중요한 역할을 했고, 포스트모던의 시대에 구상 회화가 새롭게 부활하는 과정에서도 결정적 역할을 했습니다. 제7강에선 수집과 조사연구의 방법을 공부합니다. 많은 현대미술가들은 수집과 조사연구에 기반을 둔 작업을 즐깁니다. 수집한 오브제를 박물관의 맥락으로 배치해 헛의미를 창출하는 작가들이 있는가하면, 유사-과학적 방법으로 탈인간적인 작업을 귀결 짓는 작가들도 있고, 심지어 부동산을 수집해 작품을 제작한 작가도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적잖은 작가들이 수집과 조사연구를 통해 얻은 데이터를 바탕으로 스킨의 구조를 만듭니다. 스킨과 데이터베이스를 연동시켜 새로운 의미를 창출하려는 것이죠. 만화와 애니메이션에만 오타쿠(オタク)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미술에도 오타쿠 같은 이들이 있어서, 데이터베이스에서 서사를 다중 호출하는 스킨을 만들고 그를 통해 의사소통을 꾀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어떤 현대미술가는 ‘오타쿠에게 한수 배울 점이 있다’고 이야기하는데, 대체 무슨 뜻일까요? 제8강은 비기념비를 세우는 방법을 다룹니다. 기념비를 반대함으로써 또 다른 기념비인 비기념비를 세우는 일은, 전후 현대미술에서 중요한 의제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허술한 키치적 기념비로 비기념비를 세운 작가도 있고, 불가능한 기념비의 계획을 세워 비기념비적 미완의 작업을 완성한 작가도 있으며, 상상 속의 기념비를 실물로 제작하고, 그 과정에서 발생한 부산물을 작품으로 제시한 작가도 있습니다. 어떤 경우든, 기념비를 세우는 일을 죄악시한다는 점은 같습니다. 제9강에선 제도 비평의 방법과 장소특정성을 이야기합니다. 1980년대 말 이후 미술 제도와 장소의 조건을 작품의 일부로 삼아 미술을 둘러싼 권력을 비평하는 다양한 방법이 개발됐습니다. 큐레이터가 끊임없이 관리해야 작품이 완성되는 작품을 제시한 작가도 있고, 작품 제작비로 청소부 아저씨를 해외로 여행 보내고 대신 여행 사진을 제공받아 작품으로 제시한 작가도 있습니다. 왜 이런 작업을 하는 것인지, 하나하나 설명해보겠습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점은, 장소특정적 미술이 문제로 삼는 ‘장소’란, 실제의 장소를 이론적으로 재해석해낸 특정한 차원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제10강은 남의 것을 훔쳐다가 제 작업의 몸통을 꾸미는 방법을 논합니다. 오스카 와일드가 “재능은 빌리고, 천재는 훔친다”고 했던가요. 남의 사진을 다시 촬영해 제 작업이라고 우기는 작가에서, 기존의 디자인을 그대로 답습해 새로운 의미를 창출하는 디자이너에 이르는 다양한 사례를 통해 ‘전유(appropriation)’라고 하는 현대미술계에 만연한 방법의 다양한 전개를 해설하겠습니다. 요즘 미술가들은 전유 이후의 방법을 모색하느라 고심에 고심을 거듭하고 있죠. 제11강은 미술가가 제 몸을 어떻게 미술의 미디엄으로 삼는지, ‘미술가의 몸’이라고 하는 ‘에고의 성전’을 부리는 다종다양한 예술적 방법을 고찰하고 분석합니다. 출발점은 몸을 붓으로 삼은 추상표현주의의 대가 잭슨 폴락입니다. 폴락의 액션 페인팅에 대한 화답으로 등장한 여러 남녀 미술가의 성과를 냉정하게 평가해봅니다. 제12강에선 자전거 바퀴에서 인공위성에 이르는 비미술적 재료가 어떻게 미적으로 활용되며 포스트-미디엄의 상황(post-medium situation)을 연출해냈는지 살핍니다. 미술가들이 미적 미디엄의 한계를 벗어난 역사를 훑어보면, 오늘날 왜 뉴미디어 아트는 특권적 영역을 상실하고 말았는지, 왜 미적 미디엄의 재발명은 중차대한 의제인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포스트-미디엄의 상황을 이해하는 일은, 열네 차례의 강의가 제시하는 가장 중요한 과제입니다. 제13강은 제품의 형식으로 소비자 마인드의 관객에게 소구하는 법을 살펴봅니다. 기성 제품으로 제작된 작품에서, 진공청소기의 형태로 제작된 작품, 그리고 작품으로 제시된 승용차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사례를 통해 현대미술에서 제품의 인터페이스가 일반적 상징 형식으로 기능하는 방식을 설명하겠습니다. 강의의 문을 여는 키워드는 기생-기능성(para-fuctionality)입니다. 마지막인 제14강에선 과정을 유희함으로써 예상 밖의 결과를 도출하는 현대적 방법을 공부합니다. 포스트-프로덕션(post-production) 과정의 미적 함의, 피처링(featuring)이나 매시업(mashup)의 방법이 지닌 의의 등을 살펴봅니다. 이 가운데 가장 흥미로운 현상은, 이러한 과정에서 작가들이 현실과 허구를 교묘하게 뒤섞어 기이한 현실을 직조해낸다는 점입니다. 왜 많은 작가들이 현실과 허구를 이어붙이는 데 매료되는지, 그것이 우리가 세상을 보는 방식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 생각해봅시다. 자, 앞으로 전개될 열네 번의 연강, 꽤 재밌는 미술 공부가 되지 않겠습니까? /// 임근준 AKA 이정우 _ 미술·디자인 평론가, 홍익대 BK연구원, DT네트워크 발기인. 1995년부터 2000년까지 동성애자 인권운동가로 활동했고, 이후 아트선재센터 어시스턴트 큐레이터, 계간 공예와 문화 편집장, 한국미술연구소/시공아트 편집장, 그리고 월간 아트인컬처 편집장 등을 역임했다. <크레이지 아트, 메이드 인 코리아>(2006), <에스케이모마 하이라이트>(2009), <이것이 현대적 미술>(2009) 등이 대표 저작이고, 2011년 8월 <예술가처럼 자아를 확장하는 법>을 발간했다. _ 문의/접수: 02-515-8140 _ info@ait.co.kr _ 오시는 길: http://www.ait.or.kr/ait/contact ------------------------------------------------------------------ *강의가 이미 시작됐습니다만, 추가 신청을 받는다고 주최측이 홍보를 요청합니다. (수강료는 30만원이었지만, 추가 신청자는 앞으로 남은 분량만큼만 내시면 된다고 들었습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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