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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03월 05일
*오는 3월 5일에 개강합니다. 오랜만에 재개하는 강의라, 기쁘네요. / **앞으론 비상시(거리두기 단계 강화시)에 강의를 중단하지 않고, 줌으로 온라인 강의를 이어나가게 될 예정입니다. 감사합니다.
/ ![]() 2020년대의 현대미술: “살아남는 미술이 좋은 미술이다” 강사: 임근준 _ 미술·디자인 이론/역사 연구자 일시: 2021년 3월 5일 - 5월 21일, 매주 금 19:20-22:00 장소: 현대백화점 본점 문화센터 (별관1층 살롱H) *백화점 인근의 별관 건물입니다. 지도: http://naver.me/GCIadroD 문의: 02-549-4560 신청: https://www.ehyundai.com/newCulture/CT/CT010100_V.do?stCd=210&sqCd=141&crsSqNo=21317&crsCd=203013&proCustNo=P02039782 코로나 판데믹 제2년을 맞아, 포스트-판데믹 시대를 준비하는 마음으로 새로운 강의 프로그램을 구성해봤습니다. 한계 상황의 돌파를 위해 현실 인식을 갱신해야만 한다는 것을 전제한 상태에서, 현대미술의 존재 조건 변화를 살피고, 정치적 우상으로서의 조각이 힘을 되찾게 된 이유를 고찰하고, 현대미술관계의 소장선을 기동시키는 역사관을 되돌아보고, 한국성/한국색의 구조를 해체-재구성하는 일의 중요성을 이야기하고, 한국현대미술의 동시대성을 역사적으로 재평가한 뒤, 기타 부가 의제들을 다룰 예정입니다. 2010년대 한국현대미술을 결산하고, 신형상미술의 한 사례를 고찰하고, 동시대미술로서의 한국화를 살펴보고, 포스트-한국화의 매체 재창안 사례를 비평하고, 퀴어 아트의 역사적 전회를 공부하고, 한국의 퀴어 형식주의와 비기념비적 오브제의 명과 암을 따져봅니다. 강의 구성은 진행 과정에서 다소간 변경될 수 있으니, 미리 양해를 구합니다. 고맙습니다. 제1강 _ 스마트폰으로 재매개된 세상, 그리고 위기의 현대시각예술: 자본주의의 상업적 실재 그 자체가 예술화하는 새로운 시대의 도래 (+ Sasa[44]의 <엉망>전과 <와당탕퉁탕>전) 제2강 _ 정치적 우상으로서의 조각상이 발언력을 되찾는 이유와 조각/오브제의 존재 방식 변화 제3강 _ 미술관 소장선을 형성하는 비평적 역사관: 1929년의 대공황과 미국현대미술관계의 정체성 형성 제4강 _ 국립현대미술관의 정체성과 소장선의 역사성: <한국근대미술60년>전에서 <시대를 보는 눈: 한국근현대미술>전까지 제5강 _ 한국현대미술과 한국성/한국색의 우회 고찰: 고유섭의 ‘구수한 큰 맛’과 ‘리얼한 것’으로부터의 추동 (+ 서울시립미술관 소장선에서 찾은 한국성/한국색의 구수하고 큰 뿌리와 새로운 확장의 가능성) 제6강 _ <당신의 나의 태양> 다시 보기: 한국동시대미술을 어떻게 역사화할 것인가? (논점: 이미지와 서사의 귀환, 모방과 전유, 장소특정성, 타자성과 하위 주체성, 그리고, 민주화와 전지구화) 제7강 _ [10년 결산] 2010년대 한국현대미술은 무엇을 성취했나: 포스트-컨템퍼러리 미술의 갈팡질팡과 세대교체의 흐름 (+ [2020년 결산] 신종코로나판데믹 제1년의 한국현대미술계와 비평적 이슈들(에 대한 개인적 회고) 제8강 _ [신형상 미술 재조명] 류인, 한국현대조각사의 물음표이자 느낌표로 남은 제9강 _ [동시대미술로서의 한국화] 김호득, 동적 시공을 지향하는 (신)몰골추상의 질서: 추상화한 필획의 구사를 통해 헛이미지를 구축해낸 까닭은 제10강 _ [포스트-한국화의 재평가] 이배의 므네모시네 아틀라스를 위해: 정신적 매체의 재창안과 역사적 맥락 제11강 _ [퀴어 아트의 종언?] 오스카 와일드의 <도리언 그레이>와 LGBTQ 미술의 역사 제12강 _ [한국의 퀴어 형식주의와 비기념비적 오브제] 최하늘의 퀴어 아트? 퀴어 아트의 최하늘?: 악마의 변호인이 묻는다, 퀴어 형식주의는 유효한가? 강사 소개 _ 미술·디자인 이론/역사 연구자 임근준은, 1995년부터 2000년까지 LGBTQ 운동가이자 현대미술가로 활동하며 한국 사회의 작은 변화를 이끌기도 했다. 『공예와 문화』, 『아트인컬처』, 한국미술연구소, 시공아트 편집장으로 일했다. 저서로는 『예술가처럼 자아를 확장하는 법』(2011), 『이것이 현대적 미술』(2009), 『크레이지 아트, 메이드 인 코리아』(2006) 등이 있다. 2008년 이후 당대미술이 붕괴-해체되는 과정에서, 돌파구 창출에 기여하고자 애썼다. '통사로서의 현대 한국/아시아 미술사를 작성하는 일'을 다음 과업으로 삼고 있다. ![]() 2021년 03월 01일
[전시미분사 #1 <당신은나의태양> 다시 읽기 쓰기 말하기]
2021년 3월 1일 오후 2시 웨비나 _ 이영철 선생님 인터뷰 질문지 (가안) 이영철 선생님은 한국현대미술의 역사에서 ‘저자로서의 큐레이터’ 제1호로 꼽히는 인물이시므로, 오늘 <당신은 나의 태양>전시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기 전에, 즉, 본론에 앞서 큐레이터로서의 정체성이 형성-변화한 과정을 좀 살펴보고 그를 바탕으로 말씀을 나눠보고자 합니다. 미술가들은 CV가 대부분 공개돼 있고, 구글링만 해도 활동상을 쉽게 파악할 수 있는데 반해, 큐레이터와 평론가/이론가는 그렇지 않은 경우가 더 많습니다. 제가 오늘 행사의 기획자 여러분께 사전에 간단한 이력을 요청했습니다. 이영철 큐레이터와의 세대적 차이를 먼저 짚고 넘어가고 싶었거든요. 박가희(b.1985) 큐레이터. 현대미술이론을 전공했다. 2012년 아르코 미술관 인턴을 거쳐, 2013년부터 2017년까지 서울시립미술관에서 큐레이터로 일했으며, 게스트 큐레이터로 2018부산비엔날레 «비록 떨어져 있어도 Divided We Stand»의 기획에 게스트 큐레이터로 참여했다. 현재(2020년~)는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일하고 있다. 전시를 하나의 매체로서 간주하고, 큐레이터의 질문과 문제의식이 주제나 지식의 차원으로 전달되는 것이 아닌, 우리의 질문과 문제로 전이되는 "앎의 사건(event of knowledge)"을 촉발하는 전시의 수행적 실천에 관심이 있다. 최근에는 큐레토리얼 실천으로서 과거의 전시들을 아카이빙, 연구, 맥락화함으로써 전시의 역사와 담론을 통해 다양한 미술의 역사 쓰기를 도모하는 "전시미분사"를 조직했다. 동료 기획자 전효경, 조은비와 함께 『스스로 조직하기(Self-organised)』 (2016, 미디어버스)를 번역했다. 장지한(b.1985) 미술이론과를 졸업하고, 뉴욕주립대(빙엄턴) 미술사학과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2019 SeMA-하나평론상을 수상했다. 한국 현대미술을 둘러싼 다층적인 담론의 공간을 연구한다. 현시원(b.1980) 큐레이터. 학부에서 국문학과 미술사를 전공하고 미술이론과 전문사 과정을 졸업했다. 2013년부터 2019년까지 서울 종로구 자하문로 57-6번지 한옥에서 전시공간 '시청각'을 개관 및 운영했다. 2020년 4월 오피스 형태의 전시 공간 '시청각 랩'을 열어 미술가 박미나의 드로잉 전, 미술가 김동희와 음악가 장영규의 2인전을 열었다. <천수마트 2층>(국립극단, 2011), <다음 문장을 읽으시오>(박해천 · 윤원화 공동 기획, 일민미술관, 2014), <스노우 플레이크>(국제갤러리, 2017) 등 전시와 프로젝트를 기획했으며, 시청각 공동 디렉터로 전시와 출판 활동을 병행해왔다. 저서로 『1:1 다이어그램』(워크룸프레스, 2018), 『아무것도 손에 들지 않고 말하기』(미디어버스, 2017), 『사물 유람』(현실문화, 2014) 등이 있으며 계간 「시청각」을 발행한다. 권태현(b.1990) 미술이론과 문화연구를 공부하며 글을 쓰고 전시를 기획한다. 미술계에서 활동하지만 미술 안쪽에 있는 미술이 아닌 것들에 더 관심이 많다. 미술과 정치가 서로에게 만들어 내는 틈과 그 가능성에 대한 연구를 지속하고 있다. 김익현(b.1985) 김익현은 실재하는 것과 보이는 것, 과거와 현재 사이의 시차(視差, parallax)를 연구하고 사진과 글쓰기를 통해 추측한다. 그는 메르카토르도법으로 그려진 세계와 해저 광케이블, 나노미터의 세계와 글로벌 가치사슬 같은 것이 만드는 연결과 단절을 기억, 상상, 관찰한다. SeMA비엔날레 <네리리 키르르 하라라> (서울시립미술관, 2016), (국제갤러리, 2017) 등에 참여했고 (세마창고, 2018), <더 스크랩> (2016~2019) 사진 전시와 이벤트를 기획했다. 김예지(b.1995) 미술이론과 미술경영을 전공했다. 전시의 장소와 제도를 탐구하는 글을 쓰며, 기존 미술 제도에 완전히 자리 매기지 못한 시각 예술 매체들의 전시 방법과 제도화의 방식에 관심이 있다. 전시 <초-극적 단상>(서울시립미술관 SeMA 창고, 2019)을 기획했다. 80년대생과 90년대생 연구자/기획자 여러분이 파악하는 1957년생 2월 23일생 지식인/미술인 이영철은 어떤 모습일까요? 그들이 평가하는 이영철의 레거시는 무엇일까요? 자, 그럼 본격적으로 질문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1. 원적이 함경남도 영흥군 인흥면입니다. 본적은 마포구 서교동이구요. 현대예술계에 북에서 월남한 집안의 2세들이 많습니다. 문화적 배경을 간단히 설명해주시겠어요? 예전에 어머님으로부터 영향을 받으신 점을 말씀하신 적이 있기도 했어요. 2. 고려대학교 사회학과를 졸업했습니다. 학번이 어떻게 되시나요? 57년생 58년생이면, 운동권의 역학에서 굉장히 중요한 인물들이 대거 포진해있는 세대이기도 합니다. 사회학도 시절엔 어떤 학생이었습니까? 사회학을 전공한 것이, 큐레이터로서 정체화하는 과정에서 영향을 미친바가 있을 텐데요. 3. 문예운동이나 집체극 창작 등에 참여한 적이 있습니까? 소위 언더 조직에 참여한 적이 있습니까? 4. 서울대학교 대학원에서 미학을 전공하게 된 계기가 있습니까? 5. 1987년의 졸업 논문을 보면, 지도 교수가 임영방이고, 논문 제목은 “예술사 기술에 있어서 해석에 관한 연구: Hans Sedlmayr의 구조분석론을 중심으로”입니다. 지도 교수 임영방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임영방은 백남준과 전지구화시대 한국현대미술계의 기틀을 닦은 사람이기도 하지만, 민중미술운동의 토대를 제공한 사람이기도 했는데요. 6. 1986년부터 1988년까지 계간미술의 기자로 활동했습니다. 당시엔 삼성문화재단 아래 중앙일보가 있었고, 계간미술은 중앙일보 출판국 소속이었습니다. 즉, 위상이 요즘과는 달랐습니다. 보면, 민주화 투쟁이 전개되는 결정적인 시기에 기자로 활약했습니다. 기억에 남는 장면이 있을 듯합니다. 당시 동료 기자로 누가 있었죠? 7. 1988년 계간미술을 퇴사한 이유가 있습니까? 8. 1989년부터 대학에 출강하기도 했고, 또 탈냉전 바람이 불기 시작했던 1989년부터 4년간 미술비평연구회에서 창립 회원으로 활동했습니다. 1992년엔 회장직을 맡았구요. 사실 미비연은, ‘혁명을 목표로 삼을 수 없는 시대에 좌파로서 뭘 해야 하는가’라는 회의와 불안을 바탕에 깔고 있기도 했습니다. 9. 그 과정에서 이영철은 1991-1993년 도서출판 <시각과 언어>의 편집장으로 일하며, 담론적 이론적 대안, 탈출구를 제시하는 역할을 맡았습니다. 당시의 활동을 어떻게 자평하십니까? 보면, 민중미술의 역할이 줄어들면서, 뭔가 새로운 동시대미술에 대한 기대가 없지 않았던 시기였지만, 아직 교집합을 찾기 쉽지 않은 때이기도 했습니다. 10. <시각과 언어>의 편집장이 되기 전, 번역서와 편역서를 다수 냈습니다. [이미지로 본 미술사](시각과 언어) 1986 [현대미술비평30선](비평엔솔로지) 중앙일보사 1987 [여성, 미술, 이데올로기] G. 폴록 1988 [현대미술의 역사] (1,2,3 권) H.H 애너슨 1989 [미술감상론](예경) 1990 새로운 지식을 공부하고 소개해야 한다는 사명감이 있었습니까? 11. 미비연의 주요 논자들 가운데, 문화연구 방법론을 취한 사람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 때문에 몇몇은 영화계 인사로 정체성이 바뀌어버리기도 했죠. 미술계로 돌진한 사람은 많지 않았습니다. 학계의 평론가나 이론가가 아니라, 현장의 큐레이터로서 활약하겠다고 마음먹은 시점이 언제였습니까? /.../ (인터뷰이 요청으로 12번 문항에서 대화를 시작합니다.) 12. 1993년 <태평양을 건너서>전(뉴욕 퀸즈미술관)을 제인 파버와 공동 큐레이팅하는 과정에서, 큐레이터 이영철은 새로운 시대의 비전을 제시했습니다. 1992년의 <헬터 스켈터>나 1993년의 <휘트니비엔날레>와 마찬가지로, 새로운 얼개를 제시하는 전시였습니다. 어찌 보면, 포스트-민중미술의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한 셈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태평양을 건너서>전은, 민중미술의 어떤 면만을 취사선택했습니다.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14. 1995-1996년 미 일리노이 주립대 미술사학과 박사 과정에서 공부했습니다. 한데, 이미 1994년에 뉴욕 소호 단 갤러리에서 큐레이터로 일했습니다. 미국 생활이 언제부터였습니까? 15. 박사 과정을 마무리 짓지 않고 귀국한 것은 광주시립미술관 학예연구실장(3급 별정직 2년 계약 공무원) 자리 제안이 왔기 때문이었습니까? 16. 1995년의 제1회 광주비엔날레 때만 해도, 임영방-백남준의 쌍두마차 체제가 오래갈 것 같았지만, 백남준이 쓰러지고 임영방 관장이 부인 집안의 무기 도입 비리 스캔들로 공직에서 모두 물러나면서, 한국현대미술계는 급변했습니다. 백남준의 사람들이었던 이용우, 김홍희, 김선정이 독자적으로 날개를 달고 날아오르기 시작한 시점이 1995-1996년이었습니다. 1993년에 개인 평론집 <상황과 인식>(일종의 포트폴리오였던)을 출간했습니다. 당시에 큰 화제였기 때문에, 저는 상당한 판매고를 기록했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고요. 왜 그랬을까요? 게다가 1996-1998년엔 편저 삼부작을 출간해 당시 현대미술을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길라잡이 역할을 하기도 했습니다. [현대미술과 모더니즘론](비평엔솔로지) 1996 시각과 언어 [21세기 문화미리 보기](비평엔솔로지) 1997 시각과 언어 [현대미술의 지형도](비평엔솔로지) 1998 시각과 언어 17. 중차대한 시점에서, 이영철은 2회 광주비엔날레 전시기획실장이 됐습니다. 권력자 임영방이 빠진 상태였기 때문에, 2회는 사실상 새출발하는 모습 같기도 했습니다. 그간 공부하고 성찰한 바를 거의 쏟아내듯이, 다소간 과하다 싶을 정도로 담론적 양태의 전시를 기획했습니다. 후회는 없습니까? 18. 하랄트 제만의 섭외는 어떻게 이뤄졌습니까? <지구의 마술사들(Magiciens de la Terre)> 전시로 새로운 비전을 제시했던 장 위베르 마르탱(Jean-Hubert Martin)을 초청하고자 했었죠? 유준상 위원장이 반대한 이유는 무엇이었나요? 19. 당시 큐레이터 이영철은 최정화와 이불을 본전시에 초청하지 않고, 박모를 선택했습니다. 사실 최정화와 이불, 박모 모두 1995-1996년 시기에 약간 슬럼프를 겪는 모습이었는데요. 좀 너무한 처사 같기도 했어요. 왜 박모만 선택했습니까? 20. 1997년의 화려한 기억은, 안타깝게도 외환위기의 충격 속에서 빠르게 망각됐습니다. 하지만, 큐레이터 이영철은 1998년 <도시와 영상 – 의식주>전을 기획하며, 한국동시대미술의 새로운 도약에 발판을 제시했습니다. 1998년 쌈지스페이스가 등장하고, 1999년 루프 풀 사루비아 등 대안공간이 나타나면서, 한국현대미술계는 2008년까지 10년의 최전성기를 누리게 됩니다. <98 도시와 영상 – 의식주>전은, 후한루 한스 울리히 오브리스트가 기획했던 <시티즈온더무브>에 대한 한국식 화답 같기도 했습니다. 많은 작가들이 당시 큐레이터 이영철을 칭송했던 기억이 납니다. 사실, 당시에 이영철은 시대의 총아였는데, 1998년 계원대 교수가 되면서 오히려 활동에 제약을 받게 된 것은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교수가 된 것을 후회하지 않습니까? 1999년부터 더 다채로운 활약을 뵐 수 있었는데, 해외 심포지엄 등을 다니면서 좀 교수 같아지고 말았어요. 1999년 1회 <공장미술제>를 기획하기는 했지만, 그리고, 2000년 2회 <부산국제현대미술제>를 성공적으로 기획해내기는 했지만, 돌이켜보면, 결정적인 시기에 더 큰 기회를 잡을 수 있었는데, 그리 되지 않았어요. 21. 그래서 2002년 평창동 토탈미술관 전시 및 프로그램 총괄 디렉터가 됐을 때도, 좀 아쉬운 면이 있었습니다. 거기가 삼성처럼 돈과 시스템으로 굴러가는 곳은 아니었으니까요. 보면, 2004년부터 미술계의 중심축은 미술관과 미술시장으로 이동했습니다. 연초에는 삼성미술관 호암갤러리의 <아트스펙트럼 2003>(2003년 12월 19일-2004년 2월 29일)전이 화제를 모았고, 2004년 2월 17일 국제갤러리에서 젊은 작가들의 그룹전 <리얼 리얼리티>가 개막했고, 6월 5일 박이소의 죽음이 뒤늦게 미술계에 알려졌고, 6월 12일 창고형 미술관 쌈지미술창고가 개관했고, 9월 3일 삼성미술관과 작가 측의 의견 차이로 인해 취소된 최정화 회고전을 대신해 <장영혜중공업이 소개하는 문을 부숴!>가 로댕갤러리에서 개막했으며, 10월 2일 <2004 서울세계박물관대회>가 COEX에서 행사를 시작했고... 그러한 새로운 판도 변화의 흐름 속에서, 10월 15일 <당신은 나의 태양: 한국 현대미술 1960-2004>전이 개전식을 치렀습니다. 10월 19일엔 삼성미술관 리움의 개관전 <뮤즈-움?: 다원성의 교류>이 화려하게 막을 올렸고, 10월 23일엔 큐레이터 김선정의 기획으로 경쟁전 형식을 도입한 <에르메스 코리아 미술상 2004>(박찬경 정연두 플라잉시티)가 개막 당일 우승자를 발표하며 크게 이목을 끌었으니, 대단한 해였습니다. 비평적 거울 역할을 해왔던 박모가 세상을 뜬 이후, 큐레이터 이영철이 <당신은 나의 태양: 한국 현대미술 1960-2004>전을 통해 한국현대미술의 동시대성을 역사적으로 되짚는 전시를 만들었다는 사실은, 꽤 드라마틱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지금 다시 전시를 돌이켜보면, 어떻습니까? 동시대성이 붕해한 오늘의 시점에서 보면, 확실히 전에 뵈지 않던 지점이 뵈기도 하는데요. 22. 어찌 보면, <당신은 나의 태양: 한국 현대미술 1960-2004>전을 통해 한국현대미술계에 새로운 역사적 시각장을 제시하는 것과 동시에, 큐레이터 이영철은 자기 자신을 새롭게 갱신해냈습니다. 저는 1993년 <태평양을 건너서>에서 2000년 <부산국제아트페스티벌(PICAF)>까지가 이영철 큐레이터의 1차 전성기였다면, 제2의 전성기가 2004-2008년이었다고 봅니다. 1차 전성기가 '바로 지금'으로서의 동시대의 탐구, 즉 가로축 탐구였다면, 2차 전성기는 역사적 성찰, 즉 세로축 탐구가 추가된 모습이었네요. 일련의 과정을 거치며 업데이트된 이영철 선생님의 자기 성찰이 전시로 물화된 게, <탈속의 코미디: 박이소 유작전> 2006년 3월 10일이었습니다. 따라서, 사실 <탈속의 코미디: 박이소 유작전>은 <당신은 나의 태양: 한국 현대미술 1960-2004>전과 세트 아닌 세트가 되기도 합니다. 최정화 회고전을 만드셔야 하는 입장은 아닌가요? 23. 박모, 박이소는 한국현대미술계에서 동시대성의 함의를 성찰한 최초의 미술가라고 볼 수 있기도 합니다. 박모와 최정화는 전시를 잘 만드는 사람들이기도 했죠. 비정규적 방식으로 전시에 개입하는 걸 좋아했다는 점도 유사하구요. 하지만, 박모와 최정화 이전에 이미 동시대미술의 핵심 가운데 하나였던 “이미지와 서사의 귀환”이라는 흐름은, 1978년의 동아미술제 이래, 1980년대 내내 꾸준히 전개됐습니다. 한데, <당신은 나의 태양: 한국 현대미술 1960-2004>전은, 그런 흐름 대신 실험미술을 뿌리로 지목했습니다. 다소간 편향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1978년에 시작된 신형상 미술과 소그룹 운동의 흐름을 제외한 이유가 있나요? 24. 한국의 동시대미술을 평가할 때, 이미지와 서사의 귀환, 타자성, 하위주체성, 전유의 방법론, 담론적 장소 특정성 등, 구미의 기준만을 취하는 것도 문제가 될 수는 있을 겁니다. 한국동시대미술만의 특징이 있다면, 뭘 꼽으시겠습니까? 25. 2005년 제1회 안양공공예술프로젝트(APAP)를 기획하고, 2006년 <탈속의 코미디-박이소 유작전>을 기획한 뒤, 2008년 세계금융위기의 해에 백남준미술관 초대 관장이 돼 2010년까지 전례 없는 활동을 벌였습니다. 학예실장으로 토비아스 버거를 데려왔는데, 사실상 한국에 적응하는데 실패했습니다. 문제가 뭐였을까요? 26. 한데, 아시아문화전당 전시예술감독(2013-2015년)으로 일하면서, 큐레이터 이영철의 장점이 빛을 발하지 못했습니다. 법적 문제는 승소로 마무리됐지요? 27. 한국현대미술계뿐만 아니라, 국제 미술계 전반이 전지구화와 신자유주의 시대의 후유증을 앓고 있습니다. 현대미술계에서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고 새로운 돌파구를 창출해내는 큐레이터도 거의 씨가 말라가는 형국입니다. 뭐가 문제라고 보십니까? 28. 근년에 한국동시대미술을 역사화하려는 흐름이 있었습니다. 책도 몇 권 나왔습니다. 현대미술의 현 상황을 어떻게 진단하고 계십니까? 29. 한국현대미술계를 대표하는 큐레이터라고 하면, 송미숙 이용우 이준 박경미 안소연 김선정 김성원 우혜수 강승완 등등을 꼽을 수 있지만, 1970년대생은 좀 전멸에 가깝습니다. 시청각을 운영해온 현시원(1980년생), 안인용(1980년생)을 봐도, 1980년대생부터가 또 새로운 구간이 됩니다. 그간 1980년대생들의 신생공간/콜렉티브 운동과는 거리가 좀 있었습니다. 세대간 단절을 극복하기 위한 복안이 있습니까? 30. 교수직에서 은퇴하게 되면, 65세부터 75세까지가 또 질풍노도의 시기입니다. 어떤 활동을 기대하십니까? 31. 사전 질문이 이런 것들이 있었습니다. 32. 청중 질문 받겠습니다. 33. 마지막으로 한마디 마무리 말씀 부탁드립니다. 2021년 02월 27일
![]() 일본에 거주하는 일본인이 분야 막론하고 역사와 문화를 연구하며 살려면, 그지 같은 백인 미디오커 오리엔탈리스트 오타쿠형 의사-학자들과 공존하는 법을 반드시 익혀야 하니, 참으로 정신 건강에 안 좋은 상황이다. 원래부터 그랬던 건 아니었다지만, 아무튼 이제 심신이 멀쩡한 학생은 리그에 낄 생각을 하기도 어려운 형국. 그렇기에 일본인 가운데에서도 영역 지킴이 오타쿠형 학자나 학계/업계에서 잘 버티고. 최악은 지엽말단 트리비아에 집착하는 미디오커 백인 오타쿠 게이들. 가짜 골동이나 안 사 모으면 다행. 오리엔탈리즘에 빠진 백인 펨들도 다 일본행. 어떻게 참아. 대단들하심. (미시마 유키오는 못 참았지만.) 다행히 한국엔 그런 부류가 잘 오지 않음. 와도 자리를 잘 잡지 못한다. 한국은 좀 특이하긴 함. /// https://www.netflix.com/title/80237990?s=a&trkid=13747225&t=cp 추신) K-팝과 한류의 승리 배경 가운데 하나로, 구미의 오리엔탈리즘이 (별 볼거리가 없던) 고려나 조선과 한국을 소비 대상으로 삼지 않았다는 사실과, 그로 인해 타자화 컨텐츠와 습속이 사실상 부재해왔다는 점을 꼽을 수 있다. 백인놈들의 무시와 무관심이, 탈식민 한국에 기이한 가능성의 영역을 남겼다. 2021년 02월 27일
'<진격의 거인>에 나오는 캐릭터, 가비 브라운이 한국인을 연상시킨다'는 일본의 시청자 반응에 또 분개하는 한국인들이 있다만, 어차피 가비 브라운은 에렌 예거의 과거를 미러링하는 캐릭터다. 즉, 에렌과 가비는 기호적 등가물. 가비 브라운이 한국인이면, 진격의 거인은 네오-내선일체-컨텐츠겠네?
<진격의 거인>은 엘디아인을 유대인처럼 포장-묘사하면서 그를 통해 일본인의 난처한(억울한) 입장을 유비해내는, 대단히 무리한 전략을 구사하는 작품이다. 고쳐 말해, 유대인의 기표에 일본인의 기의를 삽입해놓았으니, 문제적인 상징이 되지 않을 도리가 없다. (일본 우익 세계관을 반영한 작품이라고 비판해봐야 별 소용이 없겠지만, 유대계 몇몇이 북미에서 홀로코스트 역사 왜곡 컨텐츠로 비판한다면, 미국의 주요 서비스 플랫폼/체인에서 밀려날 수도 있을 것.) 원작자는, 마레를 2차 세계대전 이전의 구세계 짬뽕으로, 파라디섬은 퇴행한 오늘의 일본 같은 곳으로 설정해놨는데, 일본인 시청자들에게 현타와 각성과 사이다를 골고루 먹이겠다는 욕심의 산물이다. (많이들 드세요.) 엘디아인과 파라디섬 바깥 세계의 공존과 평화를 위해 죗값을 하드캐리하는 에렌 예거의 순교로 결말이 나지 않을까 하는데, 어떻게 떡밥-대회수-서사-곡예-결말을 짓든간에, 일본 사회 밖의 시청자들에겐 비판을 받게 되리라 예상한다. /// 추신) 한국인들은 일본의 헌법 개정과 재무장을 통한 정상국가화를 두려워한다만, 그건 결국 언젠가 이뤄질 필연이다. 당분간 개헌에 성공하기 어렵겠으나, 개헌하고 정식 군대를 갖추는 순간, 전후의 모든 망가와 아니메는 그냥 박물관행임. 평화헌법이라는 실존의 조건이 사라지면, 서사가 작동을 멈추게 되거든. 일본의 개헌 = 망가 아니메 산업의 최후라는 말씀. 그날이 궁금하지 않소? ![]() ![]() ![]() ![]() ![]() ![]() ![]() ![]() ![]() 2021년 02월 10일
일본에서 현대미술의 지위가 급락하게 된 이유 가운데 하나는, 버블 경제 시절의 그릇된 과시 구매 때문.
1987년 3월 야스다화재안전해상보험(현 손해보험재팬)이 위작으로 의심되는 빈센트 반 고흐의 '해바라기'를 3,990만 달러에 구매한 일도 국제적 비웃음거리였지만, 사업가 사이토 료에이가 1990년 5월 빈센트 반 고흐의 가셰 박사의 초상을 8,250만 달러에,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의 물랭 드 라 갈레트의 무도회를 7,810만 달러에 낙찰받은 뒤, 자기가 죽으면 함께 화장해달라고 요구(농담이었다고)한 일은, 일본 미술계의 모두에게 큰 충격을 가했다. (사이토 료에이의 고흐와 르누아르는 지금도 소재는 불명이다. 화장됐다는 풍문과 달리, 국외로 팔려 나갔다고 알려져 있다. 사이토 료에이의 과시적 그림 구매와 화장에 대한 괴담은, 사실 구미인들의 인종 차별에 힘을 입은 것.) 버블 다운 이후, 일본 사회의 일반인들은, 구미의 현대미술을 자신들과는 상관이 없는 영역--섣불리 나섰다가는 망신이나 당하고 민폐나 끼치게 되는 분야--으로 느끼게 됐다고 볼 수도 있다. 1980년대 내내 투기의 대상이었던 히라야마 이쿠오 등 전후 니홍가의 대표 작가들도 마찬가지로 몰락의 길을 걸었다. 무라카미 다카시와 카이카이기키의 해외 진출형 미술은, 그런 악조건 위에서 탄생했다. 무라카미 다카시가 틈만 나면, '일본에서 난 미움을 받는다'라고 말하는 배경엔 사실 여러 맥락과 함의가 얽혀 있다. /// 비고: 히라야마 이쿠오는, 묵림회의 주역이었던 민경갑과 함께, 한일 미술 문화 교류의 주역이기도 했다. https://asia.nikkei.com/Life-Arts/Arts/Forgotten-boom-the-legacy-of-Japan-s-1980s-art-buying-spree2 ![]() ![]() ![]() ![]() ![]() ![]() 2021년 02월 09일
"포텐" 하나 보고 지망생 애인을 평생 미는 분들도 있는데요...
"가능성 있는 나"에 중독되는 건 무죄입니다. 예술의 본질 가운데 하나가 그건데요. 남들도 그 "가능성"을 믿게 만들면 비로소 유죄가 성립하지만, 그러면 또 성공한 예술가가 됩니다. 무죄인 상태로 남기로 한 게 유죄일까요? 전업 예술가로 도전하지 않음으로써 알량한 가능성의 생명을 연장하는 거야, 미디오커 예술가 워너비의 생리죠. 근데, 그런 분들 덕분에 예술계는 실존하게 됩니다. 재능이 없거나 부족한 사람들이 모두 떠나버리면, '계'는 작동할 수 없게 될 걸요. '우리 애가 (혹은 내가) 머리는 좋아요... 공부를 안 해서 그렇지 하면 1등을 할거에요'가 어떻게 유죄겠습니까. 모두가 근성을 발휘한다고 생각해보세요. 어휴... 끔찍하잖아요. 한 점의 걸작은 수많은 망작과 미완성 작업들 덕분에 존재할 수 있게 됩니다. 걸작만 존재케 하는 법은 없어요. /// 추신) 예수 재림이나 미륵불도 다 사기지만, 위로를 주잖아요. '가능성이 있지만 도전은 안 하는 나'는, 나 하나만을 속이는 정치적으로 올바른 사기로서, 어디로 봐도 무죄입니다. ![]() ![]() ![]() 2021년 01월 31일
![]() 우여곡절의 현대미술 전람회, ≪올해의 작가상 2020≫ 임근준 _ 미술·디자인 이론/역사 연구자 국립현대미술관과 SBS문화재단의 ≪올해의 작가상≫을 어찌하면 좋을까. 2012년 출범해 올해로 제9회를 맞은 이 경쟁상 제도는, 화려한 출발과 달리 회를 거듭하며 여러 문제점을 드러내왔다. 본디 ≪올해의 작가≫는 1995년부터 2010년까지 매해 한 명의 대표 작가를 선정해 ‘커리어 서베이’ 형식의 대형 개인전을 열 수 있도록 후원하는 제도였다. 임영방 관장 시절에 마련한 이 전시 프로그램을 통해, 전수천, 윤정섭, 황인기, 권영우, 김호석, 노상균, 이배(이영배), 전광영, 권옥연(원로 부문), 승효상, 전혁림(원로 부문), 곽덕준, 한묵(원로 부문), 김익영, 정점식(원로 부문), 윤광조, 서세옥(원로 부문), 이종구, 정현, 정연두, 장연순, 서용선, 박기원, 총 23인이 전시를 치렀다. 중견 작가든 장노년 작가든, 기존의 작업들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평가하고, 또 새로운 신작을 발표하는 기회였으므로, 크게 화제거리가 되지 못하는 경우라 해도 작가 활동에 큰 도움이 됐다. (큰 논란으로 이어졌던 1996년의 경우를 빼면 거의 언제나 그랬다.) _ 올해의 작가를 선정하는 형식의 숨은 정치적 뿌리 사실 미술계에서 올해의 작가를 선정하는 형식으로 개인전을 주최하기 시작한 기관은 진보 성향의 서울미술관(당시 관장 김윤수)이 처음이었다. 1982년 평론가 11인이 작가 11명을 추천하는 형식으로 ≪평론가가 뽑은 문제 작가전≫을 열더니, “중앙 일간지” 미술 담당 기자 9인을 통해 “82년의 작가”로 신학철을 선정해 첫 개인전을 주최했다. 이후 신학철은 민중미술운동을 대표하는 스타로 발돋움했다. 미술기자상 수상 개인전 제도는, 이후 독립해 1983년에 이왈종을 수상자로, 1984년에 김태호를 수상자로 선정했다. 이왈종은 건강 문제로 개인전을 열지 못하다가 2년 뒤에 동산방에서 전시를 치렀고, 김태호의 개인전은 현대화랑에서 열렸다. 이후 이청운, 강희덕, 고영훈, 정경연, 김병종, 석철주, 육근병 등이 수상했다. (1991년엔 기념 개인전을 열어주는 형식의 토탈미술대상이 출범하기도 했다. 1997년의 제5회를 끝으로 사라진 것으로 기억한다.) 임영방 관장이 마련한 ≪올해의 작가≫전 제도는, 서울미술관의 사례를 국립미술관 안으로 가져온 성격이 짙었다. 1996년도의 수상전에 한국미술평론가협회(회장 오광수)가 본격적으로 비평을 가하며 문제제기를 했던 것도, 실은 작가나 도록에 실린 평문이 문제가 아니었다. 정치색을 놓고 다투는 파벌 싸움의 성격이 강했다. ![]() 하면, 그럭저럭 잘 운영돼오던 ≪올해의 작가≫전을 경쟁전 형식의 ≪올해의 작가상≫으로 개편하게 된 배경은 무엇이었을까? 일단 관장의 성향에 따라 달라지는 작가 선정의 무원칙성이 문제였지만, 더 큰 이유는 신자유주의적 바람몰이에 있었다. _ 때늦은 신자유주의적 바람몰이와 경쟁전 형식의 대우그룹 같은 뿌리 소위 “CEO형 관장”으로 발탁됐던 배순훈 전 정보통신부 장관이, 영국의 터너미술상을 벤치마킹해 경쟁전 형식의 ≪올해의 작가상≫ 제도를 출범시킨 주인공이었다. 1차적으론 그랬다. 당시 국립현대미술관은 새로운 제도 도입의 이유로, “작가 선정의 공정성과 투명성”을 이야기했고, “역량 있는 작가 발굴”과 “프로모션”을 약속했다. 즉, ‘우리도 전지구화 시대에 부합하는 스타를 키워보자’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한데 2008년 세계금융위기 이후, 이미 그런 방식은 시대에 뒤쳐진 것이 돼 있었다. (2014년 출범한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의 현대차 시리즈도 같은 문제점을 안고 있다. 신자유주의적 공동 번영의 환상은 붕해하고 있는데, 뒤늦게 초대형 미술을 추구한다? 넌센스 아닌가.) 한국현대미술계에 다소 늦게 신자유주의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던 해는, 2004년이었다. 1997년의 외환위기 이후 약 5년 동안, 1998/99년 등장했던 쌈지스페이스/루프/풀/사루비아 등 대안적 공간들이 한국동시대미술을 “하드캐리”했지만, 2004년을 기점으로 중심축은 미술관과 미술시장으로 급속히 이동했다. 당해 10월 19일 삼성미술관 리움이 세계박물관대회와 함께 개관하자, 대우 김우중 회장의 딸 김선정 큐레이터는 ≪에르메스 코리아 미술상 2004: 박찬경 정연두 플라잉시티≫를 경쟁전 형식으로 치르며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그러나, 구겐하임미술관의 휴고보스프라이즈를 벤치마킹했던 에르메스미술상은, 2016년 격년제 단독수상전 형식으로 재전환했다. 2010년대 초반, 여러 미술상 제도가 경쟁하는 양상이 전개되며, 피로감이 쌓인 탓이 컸다. ![]() 국립현대미술관과 SBS문화재단의 ≪올해의 작가상≫ 제도는, 출범과 동시에 에르메스미술상, 두산연강예술상 등을 압도했다. 예산으로나 권위로나 최고의 미술상인 것처럼 뵀다. 초기의 과열 양상은 3회까지 유지됐다. 4회에서는 퀴어 미술가가 수상했으니, 나름 파격이었다. 문제는 마리 관장 시절이었던 2016년부터 긴장감이 확 떨어지기 시작했다는 것. 2016년의 작가였던 양철모는 상습적 성추행범으로 지목되자 공개 사과와 함께 작가 활동 영구 중단을 선언했고, 2018년의 작가였던 이정민 진시우 부부는 서류 위조 논란 끝에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주최 측의 과도한 언론플레이에 부담을 느낀 몇몇 작가는, 방송 프로그램에 대역 배우를 내세우거나, 시상식에 대역 배우와 대리인을 내보내는 등, 풍자적 상황을 연출하기도 했다. _ 코로나 판데믹 상황에서 열린 아홉수의 ≪올해의 작가상≫ 전시 코로나 판데믹 상황에서 겨우 개막한 제9회 ≪올해의 작가상 2020≫은, 김민애, 이슬기, 정윤석, 정희승의 4인 경쟁전으로 펼쳐졌다. 제한적으로 전시 관람이 이뤄지던 가운데, ≪올해의 작가상≫은 여성 차별적 관점의 작업으로 화제를 모았다. 정윤석의 섹스돌 관련 영상 설치 작업 ≪내일≫을 본 관객의 분노가 소셜미디어상의 비난 여론으로 이어진 것. 후보 자격을 박탈하라는 해시태그 시위도 전개됐다. 나는 작품의 철거나 후보 자격 박탈 같은 주장엔 동의하지 않는다. 하지만, 여성/약자를 부당하게 재현했다는 점은 꼭 비판하고 넘어가고자 한다. 정윤석의 신작 아닌 신작이, 이성애자 남성용 여성 섹스돌을 유비로 사용하는 방식은 대단히 관습적이고 평면적이다. 포스트휴먼이나 슈퍼휴먼의 관점에서 인간을 대리하는 오브제나 서비스 등을 다룬다는 알리바이 혹은 복선과 달리, 그의 카메라와 화면 편집은 여성의 모습을 한 섹스돌을 ‘성애적으로 타자화된 여성’으로 바라보고 또 제시했다. 대단히 노골적이었다. 반면, 그를 제작하는 여성 노동자는 처량하고 무기력한 존재처럼 그려졌다. 그건 진실이라기보다 진실의 직조 혹은 날조에 가깝지 않을까. (노동 현장에서 섹스돌이 그리 성애화하는 순간이 어디 있겠는가.) 여성 노동자들을 모욕적으로 재현했다고 볼 수도 있다. 관객의 입장에서 불쾌감 혹은 그 이상의 분노를 느끼기에 충분했다. 예술의 이름으로 관객에게 남녀 차별적 유사-포르노를 보게 만들겠다는 구식 전략이었을 텐데, 그런 게 비평이 된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시대착오적이다. 기자들에게 작가는 “중립적인 시선으로 담아내려 했다. 섹스돌 공장은 성적이고 젠더적인 갈등의 현장이라기보다 소비자는 남성인데 공장에서 일하는 사람은 대부분 여성이라는 점에서 불합리한 환경을 보여주려 했다. 어떤 입장도 담고 있지 않다”고 설명했다는데, 기만적 언술이다. 가치중립을 방패막이 삼아 성차별적으로 재구성된 영상을 리얼리티로 강제해내는 방식이, 곧 그의 입장이다. 나는 ≪올해의 작가상≫전을 두 번 관람했다. 동선 연결 문제로 두 번 모두 4전시실의 정윤석, 3전시실의 정희승, 2전시실의 이슬기와 김민애 순서로 봤다. ![]() _ 01. 정윤석의 ≪내일≫ ![]() 정윤석의 영상 작업 ≪내일≫의 메인 프로젝션은, 러닝 타임이 무려 2시간 34분이었다. 평문 작성을 위해 미술관을 통해 스크리너 링크를 요청했지만, 답변은 ‘작가가 작품이 상영되는 환경을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에, 스크리너 링크 제공이 어렵다’는 것이었다. 작품이 상영되는 환경을 중시한다고? 농담하나? 개막일엔 성적 표현의 수위가 높은 장면에 대한 경고 안내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전시 개막 초기엔 간의 의자만 몇 개 놓여 있었고, 러닝 타임 안내도 없었다. 코로나 판데믹으로 인한 제한 관람이 2시간 단위로 이뤄져서, 한 작품을 다 보지도 못한 관객에게 그만 나가라고 강제하는, 웃기지도 않는 촌극이 반복됐다. (추후 미술관측은 네 명이 앉을 수 있는 소형 소파를 추가로 설치했다.) ![]() ![]() ![]() 정윤석의 2020년작 ≪내일≫은, 2018년 개인전 ≪눈썹≫의 확장판이었다. 당시에 그는 후속작 2부와 3부를 계획하고 있다고 말했으니, 후속작으로 볼 수도 있지만, 같은 푸티지와 유비가 반복됐다. 추가된 것은, 섹스돌 5개와 함께 사는 일본인 기혼남 나카지마 센지(中島千滋)의 영상과, 고양이 카페를 운영하는 여성 이자와 히로미(伊沢ひろみ)를 허수아비 후보로 앞세워 AI 정치를 주창하다가 실패한 우파 남성 마츠다 미치히토(松田道人)의 영상이었다. ![]() 2시간 34분 동안 싱글 채널 프로젝션으로, 정윤석은 정말 지루하게 자신의 논지를 제시했다. 지리멸렬하니까 지리멸렬하게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중국의 섹스돌 공장과 여남 노동자들과 제작 환경을 둘러보는 장면에서 시작해, 섹스돌과 함께 사는 것으로 국제적 악명을 얻은 나카지마 센지의 모습을 제시하고, 다시 중국인 노동자들의 인터뷰와 나카지마 센지 부부를 이어붙이고, 지쳐가는 중국의 농민공 여성과 섹스돌을 교차 편집하더니, 다시 일본의 주택가로 가서 나카지마 센지의 섹스돌을 화면에 담는다. 방송국 취재진이 나카지마 센지를 다루는 방식을 촬영-제시해 잠시 비판적 거리를 확보하더니, 그렇고 그런 사연이 이어진다. 마네킹으로 화면이 전환되고, 시체처럼 쌓인 마네킹 장면을 재활용하고, 남성기로서의 롯데 타워를 제시하며 박영선 장관이 AI 로봇 소피아와 언론 플레이를 벌이는 장면을 이어 붙인다. 로봇 기본법 이야기를 하니까, 이제 고령화 사회의 위기에 빠진 일본 다마시의 시장 선거에 나선 AI 정당의 이야기가 나올 차례. 여성 취재진이 가짜로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이는 장면은, ‘인형으로서의 인간’을 제시하는 악의적인 유비 장치. 정치 불신에 빠진 사회 부적응형 일본인 남성들의 엉터리 토론과 실언이 나오고, 다시 오케이 구글 서비스를 이용하는 나카지마 센지 부부가 이어진다. 나카지마 센지가 섹스돌을 씻기고, AI 정당의 엉터리 유세와 기자 회견이 벌어진다. 나카지마 센지가 자신의 미디어 출연 영상을 모니터링하는 장면에, 다시 AI 정치를 대정봉환(大政奉還: 1867년 막부가 메이지 천황에게 통치권을 반납한다고 선언했던 정치적 사건)에 비유하는 슬픈 헛소리가 이어진다. 감독은 질 낮은 정치토론을 ‘섹스돌이 인간보다 나을 수도 있다’는 주장을 위한 장치처럼 배치해놨지만, 설득력은 제로. (AI 정당의 남자들이 맥주를 마시며 선거 전략을 논하는 장면은, 아즈마 히로키의 음주 토론 장면과 대단히 유사해서 더 슬프고 무력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나카지마 센지의 인터뷰—때로 취조에 가깝게 느껴지는—가 이어지는데, 감독이 작업을 만들어내기 위해 답변을 유도하고 또 유도하지만, 나름 방송 미디어에 익숙한 일본인 남성은, 결코 화끈한 답은 해주지 않는다. 분량을 뽑기 위한 전형적 어뷰징 인터뷰가 지루하게 이어지지만, 남자는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이데올로기에 대해선 양보가 없다. 다급해진 감독은 통역을 통해 “‘결여’를 메우려 인형과 사는가?”라는 실례의 질문까지 던지지만, 나카지마 센지는 “내 눈앞에 메구미가 나타났을 뿐”이라고 응수한다. 대화로 드라마가 성립이 안 되니, 가라오케 장면으로 억지 드라마를 만든다. 1시간 50분이 지날 무렵인데, “외톨이별” 어쩌구 하는 노래가사에 맞춰 감독은 남자의 얼굴을 클로즈업하고, 뮤직 비디오처럼 그의 인생을 편집해 제시한다. 다시 고령화 사회의 다마시가 나오고, 노래방에서 ‘노래가사바꾸기’로 정당 홍보 노래를 녹음하는 마츠다 미치히토가 나오는데, 하필 특정 코드의 남성성을 상징하는 언더아머를 입혔다. 정치 전반에 대한 불만을 노래하는 남자는, 이어지는 인터뷰에서 ‘꼴통’으로 이미지를 굳힌다. 출근길 유세에선 마츠다 미치히토가 기어이 아자와 히로미의 마이크를 빼앗고야 말고, 다시 나카지마 센지가 나온다. 모친 사별과 부인의 냉정함에서 느낀 외로움을 고백하고, 감독은 다시 ‘망각’을 주제로 치매에 대한 유도 심문을 시작한다. ‘잊음은 죽음에 대한 공포를 잊게 해준다’는 철학적 메타 발언을 뽑아내는, 역시 어뷰징 인터뷰다. 다시 다마시의 개표 현장. 이자와 히로미 후보는 0표를 얻었고, 귀가하는 차량 안에서 남자들은 지질하게도 이자와 히로미를 탓한다. 감독은 나카지마 센지에게 섹스돌 공장의 인형 제작 과정을 보라고 요구하고, 물청소 단계의 섹스돌과 공기 청소하는 남자 노동자의 몸을 대비해 제시한다. (이 대비 장면이 작업의 핵심으로, 뒤편에 설치된 딥디크 영상에서도 핵심으로 재활용됐다.) 첫사랑의 이름을 붙인 섹스돌 이쿠에가 나오고, 코크링을 착용한 나카지마 센지가 샤워를 마친 이쿠에와 성교한다. (이 장면이 영화의 극적 고점이 된다.) 상투적으로 번개 치고 비오는 날이 이어지고, 드라마 영상을 보며 조는 남자. 촬영 중 전화를 받은 남자는 통화 상대에게 시큰둥하게 촬영 중임을 밝힌다. (이 남자는 미디어의 희생자가 아니라는 걸 간접 주장하는, 방어용 장치가 된다.) 짧은 암전 후 다시 화창한 교외 주택이 나오고, 일광욕을 마친 인형을 남자가 안고 집안으로 들어가면서, 영상은 2시간 34분에 이른다. 엔딩 크레딧도 없이, 다시 음악이 나오며 중국의 공장으로 루핑. ![]() ![]() 영화에서 단 한 번도 정윤석은 여성의 목소리와 시점을 중요하게 다루지 않았다. 사회에 부적응한 남자들의 시선과 목소리를 통해, 대체물로 제시되는 여성 모양의 섹스돌과 마네킹을, 최선을 다해 성적 타자로서 추적했다. 지극 정성으로 추적하니까, 길고긴 취재 과정과 편집이, 모두 섹스돌과 마네킹을 성애적으로 재현해내기 위한 알리바이 만들기처럼 느껴질 지경이었다. 아니, 나는 실제로 2시간 34분짜리 영상이 본편이 아니고 실은 부속 영상이라고 생각한다. 부가 작업처럼 제시된 반대편의 딥티크 영상 쪽이, 실은 진짜 본편이다. 딥티크 영상은 약 20분 정도의 길이었다. ![]() 쾅쾅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시작하는 두 폭의 화면은, 역시 공장의 아침 구호와 작업 환경으로 서두를 장식하는데, 사운드는 하나로 묶여 있다. 중국의 섹스돌 공장이 주재료고, 다소 연출이 용이했을 한국의 마네킹 공장 쪽 영상은 보완적 부가 재료로 활용된다. 비닐 자루에 다긴 마네킹은 시체로 유비되고, 음악이 나오면서 블레이드 러너에 영감을 받은 여타 포스트휴먼 영상들처럼 멋을 부리기 시작한다. (‘똥폼’을 잡는다.) 공장 벽면의 성경 문구 낙서도 관습적으로 제시되고, 후반으로 가면 다시 현장의 소리와 음악을 뒤섞는다. 로봇 게임 영상과 사체 같은 인형을 짝지우고, 핵실험용 더미를 피해자처럼 뵈도록 편집해 넣은 뒤, 다시 공장의 영상을 통해 머리통 다리 등을 인체처럼 보도록 유도한다. 마오쩌둥 초상이 비춰지고, 다시 현장의 소리가 사라진 상태에서, 인형의 머리통과 자는 여공의 머리가 비교-제시되고, 마네킹에 백색 도료를 도포하는 장면과 미래의 시민처럼 제시되는 섹스돌이 이어진다. 섹스돌을 사람처럼 묘사한 뒤 공장 벽면의 우주에서 본 혹성(지구?)의 이미지를 제시하고, 음악과 함께 인형의 예쁜 거대 가슴 등으로 보는 이를 흔들어보려고 애쓴다. 빛과 어두움의 모티프로 공장을 다루고, 논픽션 다이어리에서 사용했던 사건 재연용 마네킹이 잠깐 나오더니, 이산가족 찾기에 동원된 마네킹이 교차 편집되고, 깃털 눈썹을 억지로 붙여놓은 마네킹 이미지(감독이 잡착해온 페티시 컷)가 재활용되고, 시체 같은 마네킹, 사람 같은 섹스돌 옆에서 누워 자는 남자 노동자를 잇는다. 구시대적 구린 유비의 연속을 통해 작가는 훈계를 한다. 섹스돌도 인간에 버금가는 주체라고. 다시 섹스돌의 커더란 가슴이 나오고, 옆구리의 구멍을 메우는 성경적 알레고리가 제시된 뒤, 핵심이 되는 유비, 즉 섹스돌의 물청소 장면과 공기 목욕으로 먼지를 제거하는 남자 노동자의 몸이 대비를 이룬다. 마무리는, 여인 좌상처럼 앉은 마네킹에게 면사포처럼 씌워져 있던 비닐이 벗겨져 날아가는 연출 장면과, 물을 내뱉는 호스의 대비로. 끝. 역시 엔딩 크레딧은 없다. ![]() ![]() 정윤석은 일민미술관에서의 개인전 ≪눈썹≫에서 큰 문제가 없었으니, 보완 장치를 추가한 개정판 작업 ≪내일≫도 별 탈 없이 전시-상영될 것으로 생각했을 터. 하지만, 그새 또 시대상이 바뀌었고,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이라는 장소와 ≪올해의 작가상≫이라는 기회는 작가의 문제점을 더 도드라지게 만들었다. 시장에서 여성을 대체하는 여성형 섹스돌이 대세라고는 하지만, 엄연히 남성형 섹스돌도 제작-판매가 되고 있다. 하지만, 작가는 단 한 번도 남성형 섹스돌은 다루지 않았다. 여성의 목소리와 시선에 단 한 번도 이입하지 않았다. 농민공 여성들의 인터뷰는 방어용으로 전진 배치시켜놨을 뿐이었다. 다마시 시장 선거에 출마한 이자와 히로미의 목소리나, 그의 시점으로 보는 선거와 정치 상황에 대해선, 완전히 무관심하다. 철저하게 여성 주체는 소외되고 타자로서 동원될 따름이었다. 이번 작업 때문에 나는, 정윤석의 출세작 ≪논픽션 다이어리≫마저 다른 각도에서 의심의 눈초리로 보게 됐다. 혹시 전작의 출발점도, 살인 범죄를 재연하는 범인들과 마네킹을 담은 사진 한 장이었던 것은 아닌가? 피해자를 대리하는 마네킹과, 그에 대비를 이루는 젊은 살인범들의 육체에서 어떤 매혹을 느끼고 작업을 전개했던 것은 아닌가? 그런 의심을 지울 수 없는 것은, ≪논픽션 다이어리≫에서도 정윤석은, 먼저 푸티지 영상들의 교차 편집으로 하고 싶은 이야기를 다 만들어놓은 뒤, 추가로 운 좋게 얻어낸 두 명의 증언, 즉 고병천 반장과 한완상 전 부총리 겸 통일원 장관의 스토리텔링을 통해, 포스트-시네마의 구조를 확충해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윤석은, ≪내일≫에서도 고병천과 한완상처럼 자신의 영상 훈계 메시지를 가려줄 스토리텔러를 찾아야 했고, 그렇게 해서 섭외해낸 화자-피사체가 나카지마 센지와 마츠다 미치히토였다. 문제는 영상 매체의 특성을 잘 파악하고 있는 나카지마 센지가 원하는 이야기를 끝까지 들려주지 않았고, 마츠다 미치히토는 시대를 메타-분석할 능력을 결여한 주변부화한 인물이었다는 것. 결정적으로는 ≪논픽션 다이어리≫에서 성별 정치학적 문제가 도드라져 뵈지 않았던 것과 달리, ≪내일≫에선 여타 알리바이 장치에도 불구하고, 여성형 섹스돌과 마네킹을 성애화하는 방식이 성차별적으로 강조되고 말았다는 것. 영상과 관객을 좌우로 도열하는 14점의 사진들도, 여성 모양의 물건을 성노예적 여성으로 타자화하고 마는 관습적 시선 그 자체를 구현하고 있었다. 이를 두고, 여성 관객과 인터뷰와 촬영에 응한 여성들에 대한 모욕적 재현이 아니라고 할 수 있나? 애써 방어 논리를 찾아보려고 해도, 찾을 수가 없다. 게다가, 하필 정윤석의 전시 공간은, 사진가 정희승의 공간으로 연결됐다. _ 02. 정희승의 ≪침몰하는 배에서 함께 추는 춤≫ ![]() 정희승의 사진 설치물 ≪침몰하는 배에서 함께 추는 춤≫은, 47점의 사진 프린트와 박연주의 글을 담은 타이포그래피-시 엽서 더미들, 선우정아의 음원 작업으로 구성된, 예쁜 작업이었다. 하지만, 사진 속에 담긴 인물들이나 오브제들을, 섹스돌과 중첩해서 바라보게 되는 기분 나쁜 경험은 피할 방법이 없었다. 게다가, 사진가는 ≪침몰하는 배에서 함께 추는 춤≫이라는 유비적 제목으로 죽음과 소멸의 암시를 던지는 것으로 모자라, 별도의 배포 자료를 통해, 밀렌 쿤데라의 ≪웃음과 망각의 책≫에서 인용한 구절을 들이밀었다. “어떤 이들은 죽을 때까지 원 안에 남아있는가 하면, 긴 추락 끝에 산산이 부서져 버리는 사람도 있다. [...] 결국 우리는 모든 만물이 원을 그리며 돌고 있는 이 우주의 주민이다.” ≪침몰하는 배에서 함께 추는 춤(Dancing together in a sinkng ship)≫은, 이를테면, 미술계의 작업과 작가들을 이러저러한 각도에서 촬영-포집해놓은, 미술계 내부와 외부의 원형 궤도 질서와 추락에 대한 문화인류학적 보고서다. 정윤석의 영상에 크레딧이 전혀 없는 것과 달리, 정희승은 자신의 작업에 포집되니 타인의 작업을 일일이 밝혔다. 촬영에 응한 인물들도 모두 협업자로 이름을 적시했다. 아무튼 예쁜 설치로 제시된 현대미술계의 어떤 원 같은 질서 속에서 중심축을 이루는 것은 두 대의 스피커를 내장한 노란 벽면이었다. 선우정아의 짧은 노래가 반복되는 가운데, 노란 가벽은 지구를 연상케 하는 형상(장종완의 드로잉 작업)을 촬영한 ≪구(Orb)≫와 노젓기 운동 기구로 신체를 단련하는 남자를 촬영한 두 폭의 사진 ≪노를 저어라(Row your boat)≫를 제시했다. 즉, 구가 침몰하는 미술계의 배라면, 미술계에서 사람들은 열심히 노를 저어야 하는 팔자라는 이야기다. 스피커가 하나는 낮은 곳에 하나는 높은 곳에 설치돼 있다. 의사-유형학적 방식으로 목록화된 사진을 통해, 미술계 속에서 최선을 다하는 자신을 풍자했다. ![]() ![]() ![]() ![]() 이미지 자체는 퍽 관습적으로 뵈지만, 불과 10년 전만해도 잘 프린트되지 않던 하이라이트와 어두움 속의 미세한 계조가 예쁘게 구현된 사진들로 보는 한국현대미술계의 어떤 인맥과 질서는, 낯익지만, 낯설었다. 이러한 작업의 형식으로 미술계를 5년 주기로 기록한다면 어떨까. 정희승의 방을 떠날 때마다 나는, 사진가 육명심이 기록한 한국의 예술가들을 떠올렸다. 육명심의 사진에 포착된 한국인들은 하나 같이 징하게 생겼는데, 정희승의 사진에 포착된 사람들은 하나 같이 신기루 같았다. 정윤석이 기를 쓰고 섹스돌을 실체적 존재로 뵈게 만들려 노력하는 것과는 정반대의 추동이 작동하고 있다고 볼 수밖에 없었다. ![]() ![]() _ 03. 이슬기의 ≪동동다리거리≫ ![]() 반면, 이슬기는 전시작 ≪동동다리거리≫(작업 과정에서의 가제는 ≪달, 그림자, 구멍, 각설이 타령≫이었다)에서 한옥의 창호 구조와 달그림자에서 영감을 받아, 슈퍼그래픽에 가까운 벽화를 구현하고, 또 프로토타입으로 뵈는 병풍 형태의 조각 작업을 만들어 세워 놨다. 민요와 격자 구조를 중첩시켜놓은 유비를 제시했는데, 그렇다고 해서 격자 구조가 음악의 번역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달의 운동 주기와 민요의 장단에 반향하는 방식으로 벽화의 격자를 구성했다고는 한다. 한데, 기둥 구조에 화답하는 가벽 재질의 기둥 구조체를 설치해놓은 것은, 건축물을 다시 창호 구조처럼 독해보라는 뜻이었을까? 아무튼, 서울관 천장의 그리드 구조를 다시 보게 되기는 했다. ![]() 원래는 문살의 구조로 만든 문과 가벽 등을 겹으로 설치할 예정이었던 것 같은데, 어쩐 일인지 구현이 되지 못했다. 문살 구조 스스로 ‘프리 스탠딩’하는 조각을 만들고, 한 면에만 색을 칠할 생각이었다고 하는데, 아무튼 상상으로 그쳤다. 작업을 구상하는 과정에서 작가는, 권혁천 소목장, 심용식 소목장을 만나 자문을 구했고, 강성철 소목장, 한승우 건축가의 도움을 받은 모양인데, 아무튼 문살 형태로 커다란 자립 구조체를 만드는 게 쉽지 않았을 듯하다. (원래 그렇게 확장 가능한 구조가 아니니까.) ![]() 협업을 해온 지인들에게 6-7월 집 근처의 바닷물이나 강물을 담아 보내달라고 요청한 작가는, 유기체를 가득 머금은 11종의 물을 사람으로 간주하고, 장식적 형태의 유리 용기 안에 담아 목걸이처럼 늘어놓았다. (프랑스 앙스니의 라루와르강, 프랑스 몽트를레의 라루와르강, 스위스 바젤의 라인강, 프랑스 알자스 알키르쉬의 일르강, 덴마크 코펜하겐의 소연느 호수, 프랑스 북알프스 엉브랭 라뒤랑스강, 파리의 세느강, 뉴욕 오션비치, 포르투갈 리스본 타구스강 등에서 온 물이라고 했다.) 유리 작업의 구현을 위해서 작가는, 스테판 리보알, 박선민 등의 도움을 받았다. ![]() ![]() ![]() ![]() ![]() ![]() ![]() ![]() ![]() ![]() ![]() 반면 핀볼 머신의 조상님인 프랑스의 민속놀이 기구 바가텔(Bagatelle)을 재구성한 석 점의 놀이판은, 핀의 구성과 점수가 나는 오목한 구멍의 위치와 색이 모두 달랐다. 바가텔을 현대화한 조선의 미감으로 재구성한 작업인데, 실제로 쇠구슬을 제대로 칠 수 있는 구조가 아니라서, 역시 미완성 프로토타입으로 뵀다. ![]() ![]() ![]() 코로나판데믹 상황에서 전시를 준비하는 과정이 쉽지 않았겠지만, 사실상 만들다 만 상태로 전시를 개막한 것은, 좀 심하지 않았나 한다. 특히 문제가 된 부분은, 이슬기의 전시 공간과 김민애의 전시 공간 사이에 2중의 가벽이 설치되면서 형성된, 기이한 점이 지대였다. 이슬기의 문살 구조체가 좌절되면서, 벽화용 가벽이 설치되고, 그에 따라 2중의 가벽이 만들어진 모양. 아무튼, 김민애의 전시 공간으로 들어가는 과정 자체가 어디서부터 작업인지 헛갈리게 했다. _ 04. 김민애의 ≪1. 안녕하세요 2. Hello≫ ![]() 김민애는 허상과 실체에 관한 조각-논리적 조각 작업을 꾸준히 탐구해온 사람답게, 이번에도 조각가의 문법으로 전시에 임했다. 작업의 전체 제목은 ≪1. 안녕하세요 2. Hello≫인데, 각각의 작업에 1-1부터 5-1까지 일련번호가 붙어 있어서, 어떤 순서가 존재한다는 것을 암시했다. 일단 전시장의 통로 구조에 화답하는 입방체 형태의 화이트큐브 조각이 석 점 제작됐다. 각각 바퀴가 달려 있고, 거울도 붙어 있고, 또 손잡이도 달아 놨다. 몰래 힘껏 밀어봤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바퀴에 잠금이 걸려 있어서 그럴 수도 있고, 혼자 밀 수 있는 무게가 아닐 것 같기도 했다. ![]() ![]() 1-1은 청년이 사는 원룸인 것처럼 음각으로 문과 창문을 제시하고 있었는데, 원본이 된 통로에 맞춰 배치하면서 거울을 붙여놓았기 때문에, 통로 쪽에서 보면 착시 효과가 발생했다. 박스 아래로 핸드폰을 넣어 촬영해보니, 안쪽은 철 구조에 합판으로 돼 있고, 천장을 뚫려 있어서 서울관의 천창이 뵀다. 1-2도 역시 위가 뚫린 백색 입방체 구조인데, 다소 각도를 틀어놓았다. 길처럼 제시된 콘크리트 눈속임 접착 시트지(2-6)가 조각의 작도에 맞춰서 바닥을 질주하는데, 이는 그의 ≪2014 아트스펙트럼≫ 출품작이나 2018년 아르코미술관의 기획전 ≪기억의 틈≫에 출품했던 작업들을 연상케 했다. ![]() ![]() 1-3은 야외용 기념조상의 좌대처럼 생겼는데, 기본 크기는 1-2와 같지만, 거울의 크기도 다르고, 또 입방체 상단에 조각상을 얹어놨기 때문에 더 크게 느껴졌다. ![]() ![]() 1-1, 1-2, 1-3 모두 가벽 업체에서 현장 제작한 오브제로, 가벽 해체 없이 전시장 밖으로 이동시킬 수 없을 듯했다. 1-4-1과 1-4-2는 전시 공간을 둘로 나누는 상승 계단을 품은 박스에 화답하는 일종의 가짜 창문으로서의 LED 조명 간판이었다. 역시 동종의 작업이 2014년에 시도된 바 있다. (LED를 사용한 이유는 예각의 구현 때문.) ![]() 1-5는 소장품 하이라이트 전시 때문에 인계책으로 폐쇄 조치된 계단 공간에 적색 카펫(파이론텍스)을 깔고, 인계책을 상향 조절한 뒤, 사운드 설치를 넣은 모습이었다. 말이 사운드 설치지, 빌리 조엘의 노래 ≪더 스트레인저≫를 틀어놓은 게 전부였다. 공간을 낯설게 보라는 뜻인가 했더니, 노래의 구조가 액자형이라, 프레임 안에 프레임이 시도되는 전시의 형태와 상호 조응한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 ![]() ![]() 아무튼 1번 시리즈는 모두 전시장의 기본 공간 질서에 1차적으로/물리적으로 화답하는 방식으로 만든 작업들이었다. 반면, 2-1은 인조 잔디로 구성된 놀이 공간 같은 무엇인데, 기본 평면 사각형이 1-1과 같은 크기였다. 즉, 바깥인데, 실내의 성격을 띠었다. 그리고 관중석 같은 계단 구조의 조각 넉 점이 한 세트를 이뤘다. 즉. 일종의 경기장. (내부에 장난감 크기의 폭탄 3D 모형과 작가의 아들이 더는 갖고 놀지 않는 축구공 모양의 물렁한 천공이 놓였다. 육아는 전쟁이라는 뜻인가? 그건 전연 아니라고 한다.) ![]() 2-2는 접착식 타일을 붙여 놓은 물류용 팔레트 구조체인데, 역시 크기가 1-1과 거의 같았다. 일종의 실내 공간으로 구성된 이 조각 위로는 간이 의자 네 개가 놓여 있었다. (전시장에 검은 점처럼 놓인 의자들은 모두 9개.) ![]() 2-3은 백색 유광 페인트를 칠한 면과 칠 도구들로, 1-2 옆에 놓였다. (독수리 트로피 조각 뒷면 벽면에서 안쪽 전시 공간까지 10m 구간을 직사각형으로 유광 도색했고, 1-2 전체를 유광 도색했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알기 어렵다. 결과적으로, 직사각형의 유광 벽면은 1-2의 이동 궤적이나 어떤 그림자처럼 독해되기도 했다.) ![]() 2-4는 벽에 붙은 손잡이고, 2-5는 다시 가짜 창문이 되는 간판이었다. (이 간판은 더 구식인 형광등 형식이었다.) ![]() ![]() 2번 그룹의 작업들은 물리적 공간이 아니라 장소에 반응하는 방식으로 제작됐던 듯하다. 3-1은 1-3 위에 올라앉은 조각인데, 백조 형상인가 했더니, 기러기라고 했다. 즉, 3번 그룹의 작업들은 본인과 타인의 예전 작업들을 지시하는 참조적 성격을 띠었다. 아무튼, 진짜 기러기 형상은 아니고, 기러기 조각에 오토바이용 방수포를 얹은 모습인데, 안쪽엔 우레탄 폼만 들었다고 했다. (비고: 기러기는 자신의 개인전 ≪기러기≫[20180316-0513, 아틀리에에르메스]를 참조적으로 지시하는 장치다. 당시 전시장의 벽면엔 참새, 비둘기, 갈매기, 닭, 청둥오리, 오리, 거위, 캐나다구스, 백조가 저부조로 설치됐지만, 기러기는 부재했더랬다.) ![]() 3-2-1은 앞서 열렸던 전시의 잔해다. 아이웨이웨이의 출품작 ≪폭탄의 역사≫를 일부러 남겨뒀다. (작가 스튜디오 측의 허락을 구했다고.) 역시 리움에서 히로시 스기모토 전시의 잔해를 활용했던 것과 유사한 방식이었다. ![]() 3-2-2는 이게 웬 에너지 낭비인가 싶은 미사일 조각상이고, 3-2-3은 폭탄 조각상인데, 아에웨이웨이의 작품에 등장했던 미사일과 폭탄을 골라 3D 프린팅 방식으로 제작한 결과물이었다. 사회 비판적 작업에 대한 야유처럼 독해되기도 했지만, 직립 구조를 갖는 자코메티 이래의 현대 조각에 대한 풍자 같기도 했다. 3D 구조 정보는 인터넷에서 찾았다고 했다. (최종 크기는, 벽면에 설치됐던 프린트 이미지가 1:1 스케일이었기에, 그를 참고해 실물과 같게 제작을 의뢰했다고 한다.) 반면, 함께 직립 구조로 제시된 4-3은 기념품 볼펜 모양이었는데, 갖고 있던 펜 가운데 사진 판매전 ≪스크랩≫에서 굿즈로 제작-유포됐던 펜을 고르게 됐다고 했다. (작가는 우연이라고 했지만, 역시 보기에 따라, 냉소적 풍자가 됐다.) 펜 형태의 조각상은 조형물 제작 업체에 실물을 주고 확대 모형 제작을 의뢰했다. (펜의 길이는, 폭탄에 맞춰서 3m 정도로 결정했다고 한다.) 4-1은 크리스털 재질의 독수리가 작은 기념비의 형태로 구성돼 있는데, 레디메이드 트로피 재료로 만들었다고 했다. 마르셀 브로타스가 생각났지만, 역시 작가 본인의 개인전 ≪기러기≫를 지시했다. (구시대풍 백색 좌대 위에 호두나무 받침대가 크리스털 조각을 지지하고 있다.) ![]() 4-2는 폭탄이 터지는 형태를 관습적 모양으로 차용한 커다란 스테인리스스틸 재질의 화분인데, 거대한 재떨이로 독해되기도 했다. ![]() 5-1은 주요 작업의 단면 정보를 종합해놓은 꼴의 작품인데, 폴리카보네이트 소재의 평면으로 만든 입체 구조체로, 바퀴를 달아놓았다. (새 모양, 잔디 모양을 읽어낼 수 있었다.) 2018년작 ≪바퀴로 움직이는 조각≫과 유사한 형태였다. ![]() ![]() 이러한 세부 작업 정보가 전시장 벽면에 은색 글씨로 적혀 있긴 하지만, 도무지 읽히지가 앉아서 하나하나 맞춰보기란 다소 불가능에 가까웠다. 이게 다 뭐였을까? ![]() 일단 전시장을 크게 둘로 봤을 때 첫 번째 공간은 일종의 실내로, 두 번째 공간은 일종의 야외, 즉 서구의 공공장소로 상상됐다. (일단 자연광이 유입되므로.) 그런데 폭탄이 떨어지고, 그에 반응하는 화분이 존재하고, 방이 스포츠 경기장처럼 펼쳐지고, 부재하는 기러기 세 마리가 모두를 내려다봤다. 사실 이것저것이 논리적으로 뒤죽박죽이 되는 상황 속에서 가장 거슬리는 요소는, 손잡이었다. 예전에 작가가 계단의 난간으로 작업을 전개한 적이 있다고는 하나, 누가 봐도, 양혜규의 2019년작 ≪손잡이들(Handles)≫를 ‘디스’하고 있는 것처럼 뵀기 때문이었다. (작가는 다시 한 번, 우연의 일치라고 했다.) 게다가 때마침, 서울관에서 양혜규 작가가 원형 문손잡이로 설치 작업 ≪구각형 문열림≫을 구현해놓은 터라, 김민애의 전시는 자연스럽게 양혜규의 현대차 시리즈 전시 ≪O2 & H2O≫로 연결이 됐다. 아무래도 김민애는 경쟁전의 작가들보다는 자기 자신과 양혜규와 아이웨이웨이를 경쟁자로 사고했던 것일까? (작가는 역시 아니라고 답했다.) 언제부터 그는 이렇게 자신의 작업을 희생시켜가면서 현대미술의 허구적 면모를 자조-풍자하게 됐을까? 그건 과거 박모가 시도했다가 실패한 길 아니었나? /// 추신) 나는 ≪올해의 작가상≫이 1인 수상과 미드 커리어 서베이 전시 형식으로 바뀌어야 더 좋겠다고 생각한다. 현대차 시리즈가 지금의 형식으로 유지된다면, 더욱 ≪올해의 작가상≫은 내실 위주로 가야 옳다고 생각한다. 이제 제10회를 앞두고 제도 개선을 논의할 시점이다. *≪아트인컬처≫ 2021년 1월호 포커스 지면 기고문의 미축약/미교열 원고. 퍼옮기지 마시길 부탁합니다. (링크와 RT는 환영합니다.) 귀한 지면을 제공해주신 편집부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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