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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06월 27일
![]() 2008年 6月 27日(金)-7月 20日(日) 갤러리 팩토리 *멋진 전시 서문이라, 허락도 없이 '펌질.' 실례합니다. _ [전시 서문] 평행우주 최병일은 과학자가 아니다. 그는 대상 세계와 보는 주체 간의 명료하고 투명한 질서를 낱낱이 체계적으로 한 손에—또는 한 눈에—움켜쥘 수 있으리라 믿었던 야심찬 젊은이들과 다르다. 하지만 최병일은 마술사도 아니다. 그는 눈과 두뇌 사이의 복잡하고 경이로운 프로세스에 의거하여 반짝이는 이미지의 동굴을 건설하리라 고대했던 몽상가들, 또는 흥행주들과도 다르다. 굳이 말하자면 최병일은 평행 우주들을 짓고 부수기를 반복하는 어린 신의 제스처를 취한다. 물론 그는 초월적인 신이 될 수도, 그런 신의 위치를 점할 수도 없다. 결국 그는 현재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를 참조하여 다른 가능한 세계들을 지어 올리는 유한한 인간이다. 그런 까닭에 그의 피조물들은 때로 우리 세계에 대한 과학적 모형화의 결과처럼 보이기도 하지만—심지어 우리 세계에 대한 비평으로 읽힐 수 있는 여지도 존재하지만—그와 같은 인상은 만들어진 평행 우주들의 효과일 뿐이지 그 우주들의 존재 이유는 아니다. 과학 모형도 아니고 스펙터클의 극장도 아닌 최병일의 평행우주들은 기본적으로 보기의 행동과 보여 주기 혹은 보게 하기의 행동 간에 펼쳐질 수 있는 여러 가지 ‘액션의 합’을 구현한다. 최병일이 시각 디자이너로서, 즉 능동적인 보여 주기의 주체로서 훈련받았음을 고려할 때, 이러한 접근은 일차적으로 시각 디자인 실무에 대한 반성적 의미를 지닌다. 통상적으로 시각 디자이너와 그의 생산물, 그리고 그것을 보는 관람자 혹은 사용자의 관계는 송신자가 메시지를 코딩하여 전달하면 수신자가 그로부터 메시지를 해독하는 커뮤니케이션의 공학적 모델에 의거하여 이해된다. 이렇게 제도화된 시스템 내에서 시각 디자이너는 적어도 부분적으로 일종의 ‘송신 기술자’로서 임의의 수신자에게 개별 생산물을 완결된 시각적 대상으로 선보인다. 하지만 최병일은 이처럼 관습적으로 주어진 시각 디자이너의 위치에 충실하기보다 다른 시각 커뮤니케이션의 모델 또는 다른 시각우주의 가능성을 탐사하고 싶어한다. 이는 최병일이 단순히 편협한 외부적 제약에서 ‘해방된’ 디자이너와 사용자의 이상향을 꿈꾼다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그는 보여 주는 주체나 보는 주체에 대하여 대상 세계가 수동적으로 주체의 의지에 귀속되지 않는다는 점을 지속적으로 강조해 왔다. 이는 그가 제작하는 시각우주가 한결같이 전시 공간 전체를 점유하는 기계의 형태로 구현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전작인 <라이프 이즈 리얼_워터 포스터>(2001), <비 인 유어 포지션>(2003), <비주얼 디바이스>(2005-)에서, 최병일은 매번 관람자를 낯선 시각기계 속으로 끌어 들였다. 하지만 이 장치들은 단순히 시각 주체를 통제하고 조작하는 기계화한 신이 아니다. 최병일이 제시하는 부자연스럽고 쉽게 통제되지 않는 시각 경험의 장은 오히려 우리가 시각적 매개를 통해 세계를 경험하고 이해하며 서로 커뮤니케이션하는 조건에 대해 의식적으로 성찰하고 체험하며 행동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초창기의 예로, <라이프 이즈 리얼_워터 포스터>는 여러 가지 시각적 데이터들이 다층적으로 일렁이는 육중한 기계에서 광학적으로 프로세싱되어 시시각각 그 형태가 바뀌는 비물질적 출력물로 변환되는 일련의 프로세스를 구현한다. 사실상 관람자는 이 ‘포스터 디자인 기계’의 내부에서 작동하는 또하나의 변수로서 매순간 렌더링되는 “워터 포스터”의 결과에 제한적으로 영향을 끼친다. 하지만 이러한 기계적 무대는 거대한 생산 기계에 종속되었다는 공포감을 자아내기보다, 디자인 프로세스 자체를 인간과 기계가 함께 참여하는 일종의 유희로 탈바꿈한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비 인 유어 포지션>은 더욱 적극적으로 관람자를 끌어들여 새 생명을 얻는다. 거울, 핀홀 카메라, 영상 프로젝터의 폐쇄회로로 구성된 이 기계우주의 관건은 일견 보는 주체를 위한 특권적이고 안전한 위치처럼 보였던 것이 실상 보여짐을 위한 무대 장치라는 점이다. 그리하여 무언가 능동적으로 보려 했던 관람자는 자기도 모르게 다른 모든 관람자들의 눈앞에 우스꽝스럽게 노출되고, 자신을 둘러싼 기계적 시각장에 농락당했음을 깨닫는다. 이러한 연출은 자기 자신을 제외한 전세계의 이미지를 끊임없이 쏘아대는 텔레비전 네트워크의 대척점으로 폐쇄회로 비디오를 나르시시즘적인 자기-보기의 수단으로 제시했던 초창기 미디어 아트와 명백한 친연 관계를 보인다. 하지만 <비 인 유어 포지션>에서 관람자가 대면하는 것은 자기 자신이 아니라 그를 둘러싼 기계적 시각우주의 실상이다. 그것은 사랑하는 사람의 말을 따라하는 것 외에 자기 존재를 드러낼 다른 방도가 없는 그리스 신화의 에코처럼, 그렇게 관람자에게 관람자 자신의 이미지를 되돌리며 제 존재를 드러낸다. 언뜻 보아 <비 인 유어 포지션>은 편재하는 기술적 미디어들의 네트워크 내부에서 얼마간 전체 시스템의 작동에 부속될 수밖에 없는 사용자의 역설적인 위치를 상기시킨다. 하지만 인간을 중심으로 형성된 시각적 커뮤니케이션의 관습적 이해를 적극적으로 거부함에 있어서, 최병일은 인간에 대한 기술의 또는 인공 세계의 운명적 우위를 재천명하려 하지도 않고 또한 그처럼 능동적인 실제 세계에 대한 탐구자를 자처하지도 않는다. <비 인 유어 포지션>이 관람자를 유혹하고 농락하는 함정이긴 하지만, 관람자가 반응하지 않는다면—그리하여 스위치를 켜지 않는다면—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점은 중요하다. <라이프 이즈 리얼_워터 포스터>가 어느 정도 기계와 사용자의 자율성을 동시에 보증하는 데 반해, <비 인 유어 포지션>은 관람자가 보는 주체로서 대상 세계에 대한 통제력을 고수할 수 없는 우주이기도 하지만 그와 동시에 관람자 없이 동작할 수 없는 기계다. 이런 맥락에서 2005년 이후 발표된 일련의 <비주얼 디바이스>는 흥미로운 변이를 보여준다. 원리는 간단하다. 기계적으로 구동되는 일련의 거울들이 겉보기에 무질서해 보이는 전시장 내부를 반사하여 단 한 점의 관측 위치에서만 볼 수 있는 간단한 기하학적 도형 혹은 유의미한 숫자열들을 디스플레이하는 것이다. 거울에 반사될 전시장 벽면과 천장이 일종의 데이터베이스라면, 그로부터 형상 혹은 문자가 도출되도록 거울을 움직이는 기계 장치는 프로세서이며, 그로부터 관람자에게 유의미한 시각적 정보를 전달하는 거울들은 스크린과 같다. 하지만 이처럼 일견 컴퓨터의 메커니즘을 광학적으로 시뮬레이션하는 것처럼 보이는 <비주얼 디바이스>는 사실상 20세기 중후반에 컴퓨터가 약속했던 모든 권능을 무효화하고, 컴퓨터 설계자, 프로그래머, 컴퓨터라는 기계 자체, 그리고 사용자에게 부여되었던 능동적 행동의 강화된 역량을 고스란히 빼앗는다. 가짜 컴퓨터로서 <비주얼 디바이스>는 특정한 관람 위치에서 무엇이 보여야 하는가에 의거하여 설계되며, 따라서 데이터베이스로부터 다채로운 출력물을 프로세싱할 역량을 박탈당한 채 기계적으로 정해진 움직임을 반복한다. 이처럼 기계적으로 결정된 우주에 대하여 최병일은 창조주인 동시에 일개 수리공으로서 쉽게 통제되지 않는 기계의 물질성에 종속된다. 한편 관람자는 <비주얼 디바이스>가 부과하는 관람 위치에서 주어진 결과를 볼 수 있을 뿐, 거기서 보여지는 것에 통제력을 행사할 수 없다. 이 시각우주는 구성 요소들이 서로 완전히 결박된 형태여서, 단독으로는 아무 것도 하지 못한다. 하지만 전시장 내부에 어지럽게 흩어진 광학적 데이터의 파편들과 그 안에서 기계적으로 움직이는 거울들의 군무는 기묘한 잔상을 남긴다. 실상 주어진 눈구멍(“아이 마커”) 앞에 눈을 가져다 대고—기계를 켜고 또는 기계에 진입하여—전시장 내부를 비추는 거울상들이 모여 특정한 이미지 또는 숫자를 홀연히 떠올리는 것을 보다가, 눈구멍에서 얼굴을 떼고—기계를 끄고 또는 기계 밖으로 나와서—주어진 공간을 다시 둘러볼 때 발생하는 급격한 관점의 이동은 <비주얼 디바이스>의 진정한 초점이다. <비 인 유어 포지션>과 달리 <비주얼 디바이스>의 주연은 기계우주가 아니다. 그것은 보여 주기와 보기의 관습적 규칙들이 뒤틀어진 평행우주의 내부로 초대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이질적인 우주들을 오가면서 어떤 “정신의 눈”을 흔들어 깨우고 싶어한다. 하지만 그것은 육체의 눈을 폐기하면서 명징한 진리와 대면하고자 하는 철학자의 눈도 아니고, 육체의 눈에 의거하여 구체적인 진실을 색출하고자 하는 과학자의 눈도 아니다. 굳이 말하자면 그것은 시각 디자이너의 눈이고 그처럼 소박한 의미에서 지적인 창조주의 눈이다. 세계를 꿰뚫어보는 투명하고 직접적인 시각 경험의 신화를 거부하면서, 최병일은 세계가 우리에게 시각적으로 매개되기까지 개입하는 다중적 두께를 노출하고 그 불투명한 폭을 시각 디자인의 새로운 영토로 끌어들이려는 듯하다. 바로 여기가 이번에 새로 소개되는 <인풋 프로세스> 연작의 출발점이다. 이번 전시에서 최병일은 광원에서 쏟아진 빛이 반사되어 우리 눈에 들어오기까지의 프로세스를 조작하여, 풍경, 얼굴, 정물 같은 일상적인 시각 경험의 대상이자 전통적인 재현의 대상들을 익숙하지만 낯설게 변주한다. 여기서도 최병일은 직접 경험과 간접 경험, 실제 세계와 이미지의 이분법을 넘어서 시각적 매개의 불투명한 두께를 증폭하고 조작한다. 대표적인 예로, <프로세스 C>는 흔히 볼 수 있는 우유곽의 표면을 거울 처리하고 원래의 우유곽 표면 이미지를 전시장 벽면에 투영한 설치 작업이다. 마치 3D 소프트웨어가 형태를 모델링하고 표면에 이미지를 매핑하는 2중 구조로 3D 이미지를 렌더링하듯이, <프로세스 C>는 우유곽 오브젝트와 매핑 소스를 분리하여 ‘광학적으로’ 렌더링되게 한다. 관람 위치가 구체적으로 표시되지는 않지만 관람자는 몇몇 위치에서 우유곽의 거울면에 원래의 우유곽 표면 이미지가 정확히 반사되어 오브젝트와 매핑 이미지 소스가 하나의 시각적 형상으로 일치하는 것을 보게 된다. 하지만 그러한 잠정적인 통합은 조금이라도 시점을 바꾸는 순간 다시 와해될 것이다. 대부분의 시점에서 우유곽 오브젝트와 우유곽 매핑 이미지는 서로 뒤틀려 보인다. 이처럼 기이한 렌더링 기계-공간은 익숙한 시각경험—그것이 실제 우유곽의 직접적인 시각 경험이든, 아니면 컴퓨터로 렌더링된 우유곽 이미지의 간접적 시각 경험이든—을 매우 희소한 것으로 만든다. 적어도 그 공간 속에서 관습적으로 기대되는 ‘정상시각’은 통계적으로 비주류다. <프로세스 C>는 <비주얼 디바이스>에서 얼핏 드러났던 서로 다른 시각우주들 간의 틈새를 벌려서 만들어낸 또하나의 공간이다. 거기서 우리는 본다는 것을 본다. 더 이상 풍요로울 수 없을만큼 다양한 이미지들이 범람하는 동시대의 시각장에 대하여, 최병일은 마치 하늘 뚜껑이 답답해서 견딜 수 없는 소년처럼 지루해 하는 듯하다. 프레임의 바깥이 얼마나 넓고, 이미지 표면의 두께가 얼마나 두꺼운지, 그는 언제나 가리켜 보여주고 싶어했다. 그것이 어린 신의 의지다. 그가 만드는 평행우주들은 언제나 우리 세계 안에 이미 접혀 있었다. <윤원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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