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의 레디메이드 트랙 안에서 끝없이 어떤 선택이 내게 더 유리한가 고민하는 청년들이 있다. 아니, 많다. 너무 많다. 너무 많아서, 레디메이드 트랙에 못 들어가는 이들은 물론, 들어갈 생각이 없는 이들까지 불행하게 만드는 단계에 도달한 지 오래다.
과거에도 체리피커들이 있었지만, 지금처럼 많지 않았기에 큰 문제가 되진 않았다. 한데, 그냥 많기만 한 건 아니다. 중산층 욕망의 표준화로 인해, 원하는 것마저도 동질화됐다. 그래서 그런지, 지금은 기회주의자라는 말이 덜 사용될 정도가 됐다. 너도나도 사소한 일로 이득과 유불리를 따지니, 조그마한 공동체에서도 잡음과 다툼이 끊이질 않는다. 그거 이겨서 뭐하려고?
레디메이드 트랙 안에서 끝없이 어떤 선택이 내게 더 유리한가 고민해서, 더 나은 곳으로 도약-탈출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레디메이드 트랙 바깥의 험로를 선택지에 포함시켜 놓고 고민한다면 모를까, 그냥 무감각하게 빨리 최적의 조합을 취해 결정을 내리고 빨리 해치우는 편이 낫다. 레디메이드화한 여행에서와 마찬가지다. 사기에 가까운 ‘폭탄’만 잘 피하면 된다. 어차피 나머지 과정은 인스타그램용 사진처럼 다 거기서 거기다.
소중한 청년기에 레디메이드 트랙 안에서 뭘 골라야 좋을까 고민하는 건, 대개 불안만 증폭시키는 시간 낭비로서, 진짜 고민거리도 아니다. 현대사회의 레디메이드 트랙은, 어느 길을 선택하든 결과적으론 큰 차이가 없도록 인력 착취에 최적화돼 있다. 유리한 결정만 취한 청년은, 내일의 별 볼 일 없는 기성세대가 될 뿐이다. 그 길에서 벗어나려면, 결정적 순간에 유리해 뵈지 않는 선택을 내리는 용기를 내야 한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그런 선택이야말로 남는 장사, 크게 이기는 투자가 된다고 설득해볼 수도 있겠지만, 실제론 남의 시선을 과의식하는 성향 때문에 레디메이드 트랙 밖으로 잘 나가질 못한다는 게 또 문제다. 자기 확신이 부족하니, 용기를 내 레디메이드 트랙 밖으로 나간 뒤로도, 자기 자신이 세운 목표와 원칙에 따라 삶과 커리어를 이어나가는 과정에서, 자꾸 해서는 안 되는 일을 병행하고 만다.
자기 확신이 사라진 시대라는 점은, 현대예술계를 봐도 알 수 있다. 너도나도 유불리를 따지며 꾀를 부리니, 여기나 저기나 엇비슷한 아이디어와 기획으로 가득해져 버렸다. 작업이 좀 거칠고 구려도, 레디메이드 트랙 밖으로 휙 나아가버리는, 자신만의 목표와 이상을 수립하고 꾸준히 작업하는 사람들을 보고 싶다. 6-7년만 버텨도 인정을 받는 시대인데, 요즘은 그런 정도의 꾸준함을 가진 청년도 만나기 쉽지 않다. (83-84년생 구간엔 그래도 좀 독한 인간형들이 있었는데. 그러나 그들은 이미, 좋든 싫든 기성세대가 됐고.)
이번 가을의 서울 미술계는, 그런 면으론 최악이었다. 뭔 잔머리들을 그리 굴리나. 그러고 살면 좀 나은가?
세상 돌아가는 모습이 갑갑하니, 해맑게 과감한 예술가가 보고 싶다.
결국 현대예술은 세계관 싸움이다. 예쁘게 멋을 부려놓은 아이디어 뒤로 그저그런 욕망이 작동하고 있으면, 백약이 무효하다. 구린내만 풍길 뿐이다.
구미 미술계 일각이 젊은 백인 남자 작가들에게 등을 돌리기 시작하는 것도 다 같은 맥락. 사람 자체가, 그 욕망 자체로 구린 경우가 태반이라서.
유리한 선택지만 고르면 불리해지고 만다. 그건, 예술에서도 인생에서도, 변치 않는 진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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