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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02월 25일
인류의 내일을 비춰보는, 구리판 위의 세계상-게임
글 _ 이정우, 미술·디자인 이론/역사 연구자 타데우스로팍서울에서 열린 로버트 라우센버그(Robert Rauschenberg, 1925-2008)의 개인전 ≪코퍼헤드(Copperheads) 1985/1989≫(20221103-1223)는, 작업만 자세히 살펴보면 되는 그런 기획은 아니었다. 작고 작가를 재조명하는, 새로운 길로 접어드는 이정표로서 독해해야 마땅한 자리였다. 라우센버그재단이 내놓은 17점의 출품작 가운데, ≪코퍼헤드바이트(Copperhead-Bites)≫ 연작에 속하는 여덟 점과 ≪코퍼헤드(Copperheads)≫ 연작에 속하는 석 점 가운데 한 점(두 점은 비매품)이, 관련 사진 작업들과 함께 모두 구매 가능한 매물이었다. 그러므로 라우센버그재단이, 미술관 전시와 상업갤러리 전시의 복합 진행을 통해, 작가를 향한 미술계의 관심과 열정을 되살리고자 과감하게 움직이고 있다는 점은 분명해 뵀다. (비고: ≪코퍼헤드바이트≫ 연작에 속하는 작업들이 각각 170만 달러였고, 싱글 에디션인 사진 프린트는 한 점당 4만5천 달러였다.) ![]() ![]() ![]() ![]() ![]() 코퍼헤드는 황갈색 독사를 뜻하므로, 코퍼헤드바이트는 독사에 물린 상처를 뜻하지만, 1982년부터 대유행했던 스네이크바이트(Snake Byte)라는 애플 컴퓨터 게임을 연상케 하기도 하니, 작가의 실크스크린과 솔벤트-전사 작업을 변주하는, 꼬리에 꼬리를 무는 신작을 위한 다중적 유비로서 이해하는 것이 좋겠다. ≪코퍼헤드바이트≫ 연작은 작가의 세계 투어 프로그램 가운데 하나였던 ‘로키-칠레’ 프로젝트를 대표하지만, 사실 걸작은 아니다. 칠레 경제에서 중요한 한 축을 차지하고 있던 구리에 호기심을 느낀 작가는, 칠레 북부 안토파가스타(Antofagasta)에 인접한 구리 광산과 주조 공장을 방문해 재료에 대한 정보와 다양한 산화 기법을 습득했다. 구리판 지지체를 바탕으로 특유의 네오-다다적 구성으로 이러저러한 사진 이미지를 실크스크린으로 중첩-제시하고, 그에 다양한 회화적 제스처를 추가한 결과가 1985년의 ≪코퍼헤드바이트≫ 연작이다. (작가는 1988-1992년 다시 구리판 지지체로 ≪보레알리스(Borealis: 오로라를 지칭하는 이름)≫ 연작을 제작하고, 1989년 역시 구리판 지지체로 ≪코퍼헤드≫ 연작을 재시도했다.) ![]() 사진: 작가 미상 © The Robert Rauschenberg Foundation 거울처럼 반사하는 재질의 지지체를 활용한 창작은, 작가의 작업 세계에서 새출발을 뜻하는 ≪백색 회화(White Painting)≫ 연작(1951)에 연관되는 것이기도 하고, 마르셀 뒤샹의 ≪큰 유리≫에 대응하는 유리판 작업들과 연결망을 형성하기도 한다. 1961년 존 케이지는 ≪백색 회화≫ 연작을, 우리를 둘러싼 세계에 반응하는 수용적 표면으로 해석하며, “빛과 그림자와 미립자들을 위한 공항(airports for lights, shadows and particles)”이라고 묘사했다. 작가는 백색의 화면에 주변 환경과 관객의 존재가 반사되는 현상을 중시했던 터였다. (비고: 1952년작 가운데 ‘거울’을 부제로 단 작업이 따로 존재한다.) 고로, ≪코퍼헤드바이트≫ 연작에서도 작가는 관객이 그림을 통해 주변 환경과 변화하는 세계와 자신의 “현존재(Dasein)”를 재인식할 수 있기를 바랐다고 볼 수 있다. 아무튼, 작가는 ≪코퍼헤드바이트≫ 연작 이후 구리 외로, 황동, 알루미늄, 청동 등 다양한 금속 지지체 작업을 전개했다. 하지만, 역시 참된 출발점은, 1964년 일본 방문 때 시도했던 일본식 금박 병풍 작업 ≪황금 표준(Gold Standard)≫(1964)이 되겠다. ![]() Copperhead-Bite VI / ROCI CHILE 코퍼헤드 바이트 VI / 로키 칠레, 1985 구리에 실크스크린 잉크, 아크릴, 변색 약품 245.6 x 123.8 cm (96 3/4 x 48 3/4 in) ![]() Copperhead-Bite IV / ROCI CHILE 코퍼헤드 바이트 IV / 로키 칠레, 1985 구리에 실크스크린 잉크, 아크릴, 변색 약품 245.9 x 123.8 cm (96 3/4 x 48 3/4 in) ![]() Copperhead-Bite VIII / ROCI CHILE 코퍼헤드 바이트 VIII / 로키 칠레, 1985 구리에 실크스크린 잉크, 아크릴, 변색 약품 245.8 x 123.8 cm (96 3/4 x 48 3/4 in ![]() Copperhead-Bite VII / ROCI CHILE 코퍼헤드 바이트 VII / 로키 칠레, 1985 구리에 실크스크린 잉크, 변색 약품 245.7 x 123.8 cm (96 3/4 x 48 3/4 in) ![]() Hawk-Eyed (Copperhead) 매서운 눈 (코퍼헤드), 1989 구리에 실크스크린 잉크, 애나멜, 변색 약품, 청동 액자 123.8 x 245.7 cm (48 3/4 x 96 3/4 in) ≪코퍼헤드 1985/1989≫전은 서울에서 첫선을 뵌 기획이라는 점, 즉 기존의 전시를 수입한 결과가 아니라는 점에서도 특기할만했는데, 재단에서는 시니어 큐레이터인 줄리아 블라우트(Julia Blaut)와 작품 관리 담당자인 토머스 로치(Thomas Roach)를 서울로 파견했다. (이는 ‘해외 유명 작가의 기존 전시를 소략하게 재구성해 서울에서 선봬도 괜찮던 시대는 이제 끝났다’는 메시지가 되기도 한다.) ≪코퍼헤드≫ 연작에 속하는 ≪코퍼헤드바이트≫ 연작은 딱 12점인데, 그 가운데 8점이 1985년 제작되고 바로 전시된 이후 처음으로 공개되는 자리였으니, 갤러리와 재단 측이 서울에서의 전시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한 셈이다. 작고 작가의 유업 관리는 21세기 현대미술계의 최대 이슈 가운데 하나다. 로버트 라우센버그나 앤디 워홀 같은 역사적 존재라고 해도 예외가 아니다. 시대가 바뀔 때마다 새로운 시점으로 작업 세계를 재조명하고, 또 청소년과 청년 세대와 작가와의 연결고리를 창출-활성화하지 않으면, 허명만 남고 소중한 실체는 망각되는 수도 있다. 세월이 흘러도 현대미술은 결코 요해가 쉬운 대상이 아니다보니, 유업 관리자의 능력에 사실상 거의 모든 것이 달렸다. 새로운 관점의 전시가 꾸준히 이어지고, 적당량의 주요 작업이 매물로 나와 신세대 소장자들의 리그가 형성되고, 또 종종 경매에서 신기록이 나와야 하므로, 막후에서 여러 일들이 복합적으로 전개돼야만 한다. 로버트 라우센버그의 경우, 2008년 작가가 세상을 뜬 이후 유산과 유업을 놓고 법정 다툼이 이어지면서, 사업이 원활히 이어지지 못했다. 간단하게 정리하면, 25년 이상의 기간동안 작가의 조수이자 또 배우자였던 대릴 파토프(Darryl Pottorf)와 작가의 아들 크리스토퍼 라우센버그(Christopher Rauschenberg) 사이의 싸움이었다. 대릴 파토프가 작가의 유언 집행자였지만, 라우센버그재단은 아들이 이끌었다. 아들은 대릴 파토프와 그의 편에 선 이사진을 재단에서 밀어내고자 했고, 2011년 법적 다툼이 시작됐다. 싸움은 2017년 마무리됐고, 모마의 부관장이었던 캐시 할브라이시(Kathy Halbreich)가 재단의 디렉터로 부임하면서 유업 관리는 정상화 궤도에 올랐다. 따라서, 2017년 모마에서 개막했던 대형 회고전 ≪친구들 사이의 로버트 라우센버그(Robert Rauschenberg: Among Friends)≫는 다소 미흡한 모습일 수밖에 없었고, 다소 쓸쓸한 풍경으로 남고 말았다. 하지만, 곧 라우센버그재단은 여러 사업을 공격적으로 전개했다. 캡티바섬의 레지던시 프로그램이 다시 활성화되고, 아카이브 정리 작업에 속도가 붙고, 덜 조명된 작업들이 재공개되고, 카탈로그레조네 사업의 발표가 이어졌다. 로버트 라우센버그는 1964년 제32회 베니스비엔날레에서 미국인 최초로 황금사자상을 수상하며 미국의 피카소로 추앙받았지만, 일리아나 소나벤드가 로비로 받아낸 상은 작가의 창조력 유지에 별 도움이 되지 못했다. 작가는 1966년 이름값을 활용해 ‘예술과 기술의 실험(E.A.T.: Experiments in Art and Technology)’을 조직하고 예술계에 헌신했으며, 본인도 E.A.T의 《아홉 번의 밤: 연극과 공학》을 통해 ≪오픈 스코어(Open Score)≫를 발표하며 ‘뒤샹의 레거시를 잇는 네오-다다적 예술계의 리더’로서 승승장구했지만, 1977년 모마에서 회고전을 치른 이후로는 슬럼프에 빠지고 만다. 뒤샹이 프랑스가 아닌 미국에서 미래를 발견했듯이(그리고 아예 국적까지 바꿨듯이), 라우센버그는 미국 밖에서 가능성을 찾고자 했다. 1982년 6-7월 처음 중국을 여행하고 중국의 공예가들과 협업한 결과로 12월 모마에서 ≪중국의 라우센버그(Rauschenberg in China)≫라는 전시를 연 것이 그러한 노력의 본격적 출발점이었다. ![]() 유엔에서 ‘상호 문화 이해를 기반으로 하는 세계 평화 운동’을 설파하며 로키(ROCI) 즉, 라우센버그해외문화상호교류(Rauschenberg Overseas Culture Interchange) 프로젝트를 발표한 해는 1984년이었지만, 실제론 이미 1982년에 사업이 전개되고 있었던 것. 이후 로키는 1991년까지 7년간, 멕시코, 칠레, 베네주엘라, 중국, 티벳, 일본, 쿠바, 소비에트, 독일과 말레이시아 등 10개국(미국을 포함하면 11개국)을 도는 투어를 진행했다. 이 과정에서 작가는, 방문 국가의 문화에 적극적으로 조응하며, 200점 이상의 회화, 사진, 아상블라주, 다매체 작업을 제작했으나, 세간의 평가는 그리 긍정적이지 않았다. (로키라는 이름은, 사실 그의 애완용 육지 거북의 이름에서 따왔다. 거북이 로키는 1966년 사진에서부터 확인되고, 로키 프로젝트에서도 상징으로 활용되며 여러 사진과 영상에 등장했지만, 이후의 생사는 알려진 바 없다. 마이클 잭슨의 페르소나였던 반려 침팬지 버블스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로버트 라우센버그는 친구 머스커닝험을 도와 세계 투어에 나섰던 1964년의 경험이 로키 프로젝트의 예행 연습이 됐다고 말한 바 있다. 당시에 라우센버그의 현대무용 협업 등은 러시아발레단과 투어를 돌았던 피카소의 뒤를 잇는 것으로 비춰졌지만, 오늘의 시점에선 좀 달리 뵈기도 한다. 실제론 뒤샹처럼 타국에서의 새로운 가능성에 투자하고 있었다는 말씀이다. 뒤샹은 미국에서 자신을 추종하는 로버트 라우센버그와 존 케이지와 머스 커닝험과 재스퍼 존스 등을 만나, 미술운동사의 향방을 뒤바꾸는 특별한 인물이 됐다. 하면 라우센버그는 누구를 만났을까? 국적을 바꿀 마음이 들 정도로 자신을 추앙하는 청년 세력을 발견하지는 못했지만, 남미, 아시아, 소비에트에서 대안적 가능성을 찾고자 했던 것만큼은 분명하다. 라우센버그재단도 그리 생각하는 모양으로, 로키 프로젝트를 비롯한 세계 각지의 협업 결과를 재조명하고자 애쓰고 있다. 2019년 타데우스로팍잘츠부르크에서 개최했던 ≪보레알리스 1988-82≫전이 ≪코퍼헤드 1985/1989≫전으로 이어지고 있다면, 2022년 잘츠부르크빌라카스(Salzburg Villa Kas)에서 타데우스로팍갤러리의 기획으로 개막했던 ≪일본 점토 작업(Japanese Clayworks)≫전은 1982-83/1985년 작가가 일본의 오츠카오미도업주식회사(Otsuka Ohmi Ceramics Company: 서양 명화를 세라믹으로 구현-전시하는 것으로 이름난)와 협업한 결과를 재조명하는 자리였다. 하지만 이러한 모든 재평가 시도의 출발점엔, 2016년 중국 베이징의 UCCA에서 열렸던 대형 전시 ≪중국의 라우센버그(Rauschenberg in China)≫전이 놓여있다. 장장 길이 305미터에 이르는 초거대 작업 ≪1/4 마일 혹은 2 펄롱(The 1/4 Mile or 2 Furlong Piece)≫(1981–98)을 포함해 1982년 중국을 처음 방문했을 당시의 기록을 바탕으로 한 ≪중국식 여름집을 위한 습작(Study for Chinese Summerhall)≫(1982, 1983, 1984) 등 로키-중국의 활동을 망라하는 자리였다. ![]() 라우센버그가 로키 활동을 통해 가장 크게 영향을 미친 나라는 중국이다. (일본에는 1964년 방문 때 이미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1985년 11월 베이징의 중국미술관에서 로키-중국의 전시를 개막하기 전부터, 이미 라우센버그는 중국의 자생적 동시대미술운동에 영감의 원천으로 작용하고 있었다. 중국의 미술평론가 후앙주안(黃專, 1958-)은 라우센버그가 중국미술계에 던진 충격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이제까지 관방미술 주도하의 전시만 보아왔던 중국화가들에게 라우센버그의 작품은 통쾌함과 즐거움을 선사했다. 작가들은 다다이즘에 심취했으나 아직 해체주의의 힘에 대해 이해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쓰레기도 작품이 될 수 있다는 것이 중국 작가들을 흥분시켰다. 나는 당시 허버트 리드(Herbert Read, 1893-1968)의 책을 통해 팝 아트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뒤샹의 다다이즘을 잇는 미국의 네오-다다가 초현실주의를 미국식으로 번안했던 추상표현주의를 극복하고 새로운 확산의 장을 창출하기 위한 포석이라는 점을 간파한 중국인 미술가는 나타나지 못했지만, 아무튼 라우센버그를 팝아티스트 혹은 그 전조로 이해한 중국인들이 리셴팅을 필두로 하는 중국식팝아트운동을 창출했다면, 라우센버그를 다다 혹은 네오-다다로 이해한 이들은 아이웨이웨이에서 쉬빙으로 이어지는 소수파의 흐름을 형성했다. 그렇다면, 한국의 청년 현대미술가들은, 서울에서 열린 로버트 라우센버그의 개인전 ≪코퍼헤드 1985/1989≫에서 무엇을 봤을까? 거장의 도전과 실패, 슬럼프 말고, 더 큰 그림을 봤을까? 보통은 로키 프로젝트를 ‘아름다운 실패’로 규정한다. 하지만 나는 라우센버그가 던져놓은 진짜 승부수―유럽에서 미국으로 이동한 현대미술의 중심축이 다시 지구상의 어디론가 이동할 수 있기를 기대하는―가 아직 결판이 나지 않은 것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 추신) 로키-한국이 전개됐으면 어땠을까? 국립현대미술관엔 로키 담당자들이 조사를 위해 방한했던 기록이 남아 있다고 한다. 하지만, 로키-한국은 실현되지 못했다. 사실 백남준은 1984년 1월 1일의 인공위성쇼 ≪굿모닝 미스터오웰≫에 밥 라우센버그를 초대하려고 무진장 공을 들였다. 사전 홍보 과정에서 라우센버그도 나올 거라고 큰소리를 치기도 했다. 하지만, 백남준을 좋게 보지 않았던 라우센버그는, 결국 출연하지 않았다. 만약 그가 백남준과 협업했더라면, 엄청난 파장이 일었을 텐데. 퍽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추신2) 재단에 문의해보니, 거북이 로키는, 이름과 달리 암컷이었고, 2008년 8월에 죽었다고 한다. 연명 치료를 거부한 주인이 당해 5월 12일 영면에 들었으니, 몇 달만에 저승길을 따라간 셈이었다. 추신3) 재단 운영을 새로운 단계로 이끌었던 캐시 할브라이시는, 2023년 1월 25일, 재단을 떠난다고 발표했다. 화끈하고 깔끔한 이별이 됐다. 이하는 공문의 자동 번역(DeepL)이다: “향후 계획 2023년 1월 25일 친애하는 친구 여러분, 이 소식이 보도되기 전에, 저는 올해 5월 로버트 라우첸버그 재단의 상임이사직에서 물러날 예정이라는 사실을 알려드리고 싶었습니다. 저는 재단이 함께 이룬 성과에 대해 깊은 만족감을 느끼며, 새로운 세대의 기관 리더들이 재단을 더욱 발전시킬 준비가 되어 있다는 깊은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팬데믹의 위태로움을 헤쳐나가고, 용기 있고 심지어는 반대되는 많은 예술 및 자선 프로그램과 두 개의 주요 혁신 프로젝트를 감독하면서 재단을 이렇게 활기차고 유리한 재정 상태로 남겨두게 된 것은 특히 의미 있는 일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밥의 업적을 더 잘 이해하고 그의 유산을 그 어느 때보다 안전하게 지킬 수 있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2017년 9월, 저는 엄청난 가능성과 권한을 얻은 기분으로 재단에 도착했습니다. 제가 맡은 첫 번째 임무는 재단의 사명을 되새기는 것이었는데, 이는 밥이 일상적인 예술 활동과 더 진보적이고 자비로운 세상을 향한 대담한 옹호 모두에서 보여준 자유를 포용하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이러한 정신은 연구 및 학술 파트너십, 컬렉션 관리, 전 세계 박물관 및 갤러리와의 협업, 자선 활동과 예술가 지원에 대한 능숙하고 협력적인 접근 방식에 이르기까지 밥의 유산을 강화하기 위해 우리가 하는 모든 일에 활력을 불어넣었습니다. 저는 부임 직후 익명의 예술가 위원회를 만들어 기부를 안내하고, 생각을 넓히고, 접근 방식에 의문을 제기하는 데 도움을 주었습니다. 현재 이 단체의 자선 예산은 연간 60만 달러로, 예술가들이 선택한 다양한 이니셔티브에 사용되고 있습니다. 크리에이티브 실무자들에게 이 기관을 제공함으로써 모든 면에서 더 나은 기관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300만 달러 미만의 예산으로 상징적인 예술과 사회적 참여 기관을 모두 지원함으로써 상호 이익을 실현하는 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새로운 움직임은 양심적인 예술가들에 대한 지원을 지속하는 동시에 사람들의 삶을 더 나은 방향으로 변화시키기 위한 목적과 전문성을 갖춘 이니셔티브와 단체에 대한 추가 지원을 도입했습니다. 이러한 노력에는 트위터에서 시작된 흑인 및 원주민 토지 권리 및 농업 이니셔티브와 불체자 노동자를 위한 연합에 대한 지속적인 지원이 포함됩니다. 한 예술가는 이렇게 썼습니다. ".... 저에게 있어 위원회의 작업은 다차원적인 예술이 더 활기차고 축제적인 현실을 상상할 수 있기 때문에 예술은 예술이 아닌 모든 것에 의해 풍요로워진다는 중요한 생각을 키워줍니다." 이름도 없는 하이브리드를 포함하여 다양한 미디어를 통해 밥의 작품에 대한 대중의 이해와 영향력을 넓히기 위해 수많은 파트너와 함께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이는 부분적으로는 밥의 작품에 대한 새롭고 도발적인 해석을 제시한 학자들을 지원함으로써 달성할 수 있었습니다. 이는 헌터 칼리지의 미술사 교수진과 대학원생, 윈터서/델라웨어 대학교의 보존학 전공자들과 함께 밥의 스타일적 다양성과 재료에 얽힌 복잡한 문제를 밝히는 연례 강좌에 참여한 것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2025년 밥의 탄생 100주년을 맞아 출시할 무료 디지털 카탈로그의 첫 번째 권을 제작하기 시작하면서 초기 작품에 대한 다양한 관점을 가진 14명의 예술가, 큐레이터, 학자 및 보존 전문가에게 에세이를 의뢰했습니다. 다양한 경력의 예술가와 학자들을 플로리다의 레지던시와 뉴욕의 아카이브에 초대하여 밥의 거침없는 창의성과 지적 관대함을 직접 경험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슈워츠먼 앤 코(Schwartzman & Co)와 재단의 큐레이터들이 주도하여 밥의 작품을 이해하고 구매하는 데 있어 보다 총체적이고 전략적인 관점을 구축하는 것은 재단의 재정과 결과적으로 모든 프로그램의 미래에 좋은 징조입니다. 타데우스로팍갤러리, 그리고 최근에는 바바라글래드스톤갤러리와 므누신갤러리와의 여러 협업이 성공을 거두는 것을 보고 매우 기뻤습니다. 하지만, 지난 몇 년은 우리 사회의 문제와 취약성을 보여주는 고통스러운 그림도 함께 보여주었습니다. 예를 들어, 팬데믹과 조지 플로이드의 살해 사건은 공감 능력과 유동성을 유지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가장 원활하고 우아하게 혜택을 주기 위해 끊임없이 다르게 생각하고 행동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는, 우리에게 일상이 되어가고 있는 의무를 강조했습니다. 우리처럼 진보적인 조직에서는 질병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 위험 감수성을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게 합니다. 운영과 철학적 측면에서 민첩성이 높아진 덕분에 아티스츠릴리프(Artists Relief), 댄스페이스(Danspace), 로렌 할시의 서머베리탕 커뮤니티 센터(Lauren Halsey’s Summaeverythang Community Center), 비치 세션 댄스 시리즈( Beach Sessions Dance Series), 커즌(COUSIN), 오클랜드의 맘스 포 하우징(Moms for Housing in Oakland), 소노마 카운티의 쉘터우드 콜렉티브(Shelterwood Collective in Sonoma County), 아티스츠스페이스(Artists Space), 텍사스 국경에 있는 이민자 지원 단체인 투게더 앤 프리(Together and Free) 등 다양한 신규 및 재지원 단체의 긴급한 상황에 신속하게 대처할 수 있었습니다. 동료들의 이야기를 자세히 듣고 그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는 이 기회를 통해 이 격동의 시기에 조금씩 희망을 되찾았습니다. 또한 의료비 지원부터 무료 리허설 공간 제공에 이르기까지 예술가들을 위한 긴급 자금 지원 확대와 같은 새로운 프로그램도 알게 되었습니다. 밥의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는 프로그램, 다가오는 전시회, 최근의 자선 활동 등 제가 떠나기 전에 해야 할 일이 많습니다. 특히 캡티바에 오픈 키친/거실과 음악 녹음을 위한 첫 번째 스튜디오를 포함한 여러 개의 스튜디오를 갖춘 환경 친화적인 시설이 완공되는 것을 보고 싶습니다. 이 시설은 WXY 건축+도시 디자인이 다년간에 걸쳐 설계한 프로젝트로, 기존 10개의 건물과 20에이커 규모의 조경의 지속 가능성을 향상시켰습니다. 그리고 기적적으로도 이 모든 건물은 허리케인 이안의 맹공격 이후에도 여전히 건재합니다. 저의 목표를 달성할 수 있었던 것은 헌신적이고 열린 마음을 가진 이사회 및 직원들과 함께였기에 가능했습니다. 밥의 작품에 내재된 실험적 자유에 대한 열정과 그의 가치가 오늘날 어떻게 가장 자유로운 형태를 찾을 수 있을지 상상하며 함께 해준 재단 관계자 모두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저는 특별한 사람들과 함께 일했습니다. 특히 도전적인 아이디어를 결코 외면하지 않았던 이사회 의장 마이클 스트라우스와 아버지의 유산을 소중히 여기며 우리 모두에게 매우 높은 기준을 제시한 크리스토퍼 라우첸버그에게 감사를 표합니다. 예술을 만들고 공감하는 삶을 사는 데 있어 밥 라우첸버그 특유의 유쾌하고 반응이 빠르고 경건한 접근 방식을 흡수할 수 있었던 것은 저에게 변함없는 즐거움이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놀랍도록 민첩하고 대담하며 매우 진지하고 재정적으로 안정적인 기관이 되었으며, 이는 새로운 리더를 위한 매력적인 조건입니다. 이사회는 즉시 후보자 물색에 착수할 것이며, 저는 새 상임이사가 저와 마찬가지로 재단을 위해 놀랍고 새로운 길을 개척할 수 있는 능력을 발휘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기대가 됩니다! 캐시 할브라이시” ![]() *아트인컬처 2023년 1월호 포커스 지면 기고문의 미축약 미교열 초고. 귀한 지면을 주신 편집부(김해리 기자님)에 감사드립니다. 자료 제공 등 취재에 적극 협조해주신 타데우스로팍갤러리(담당 김해나 기획자님)에도 고마움을 표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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