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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상과 미술 담론”에 대한 질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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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상과 미술 담론”에 대한 질의

임근준 _ 미술·디자인 평론가

디자인 평론가 최범 선생님의 흥미로운 발표 잘 들었습니다.

최범 선생님께서는 비판적 리얼리즘은 진보로, 모더니즘과 형식주의를 보수로 이해하는 통상적인 국내 좌파 예술계의 시각을 어느 정도 용인한 상태에서 ‘소녀상’을 분석했습니다. 그리고, ‘소녀상’을 “전통적인 리얼리즘”의 조각으로 분류해 논의를 전개했습니다. 한데 저는 ‘소녀상’을 “전통적인 리얼리즘”의 조각으로 바라보는 시각에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예를 들어, 현대미술가 김홍주 선생님은, 광화문 광장의 ‘세종대왕상’을 리얼리즘 조각으로 분류하는 일을 비판하며, 그런 부류의 조각을, 현실이나 진실과는 동떨어진 “한국식 이상주의 조각”이라고 불러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습니다. 저도 그에 동의합니다. 리얼리즘은, 현실과 진실이 객관적으로 실재하고, 미술가는 그 전모나 핵심을 포착해 시각화-조형화해야 한다는 의식을 대전제로 합니다. 하지만, ‘한국식 이상주의 조각’에 그러한 의식은 거의 부재합니다. 저는 ‘소녀상’ 또한 현실이나 진실과는 동떨어진 ‘한국식 이상주의 조각’ 혹은 ‘한국식 염원 투사 조각’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소녀상’은, 대상의 비평적 고찰을 통해 제작해내는 리얼리즘 조각과 거리가 멀고, 따라서 ‘입체화한 일러스트레이션 이미지’로 보는 편이 더 진실에 가까울지도 모르겠습니다. 즉, 해당 오브제를 현대적 의미에서의 조각으로 간주하기는 어렵겠습니다.)

특히 ‘소녀상’의 경우엔, 때가 묻지 않은 순수한 피해자를 타자적 이상형으로 그려내고 있기에 문제적입니다. 이는, 과거 한국의 비판적 리얼리즘 미술이었던 민중미술이, 여성을 관습적으로 타자화해 표현했던 고질적 문제점을, 거의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오늘 최범 선생님께서는, 피해 당사자로서의 여성을 재현하는 방식, 그에 따르는 미적/윤리적 책임의 문제에 대한 비판적 분석은 시도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받은 발표문 초고에 “여성”이란 단어가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다소 놀라기도 했습니다.

이에 대한 선생님의 답변을 듣고 싶습니다. 여성의 재현, 특히 피해 당사자로서의 여성을 재현하는 일에 수반되는 여러 문제들을 논의에서 제외하신 이유가 궁금합니다.

최범 선생님께서는 ‘소녀상’ 자체에 대한 분석보다는, ‘소녀상’을 둘러싼 담론과 현상을 분석하는, 예술사회학적 접근 방법을 취했습니다. 그리고 그를 통해, 주요 논자들의 주장에서 드러나는 민족주의적/국가주의적 관점, 혹은 민족주의를 굴절시켜 민족을 초역사적/특권적 실재로서 괄호쳐버리는 방식을 비평적으로 분석했습니다.

‘소녀상’은 집단주의적 염원을 표현하고 대리하는 조형물이기에, 개인에 의해 제작되고 민간에 의해 추진됐다고 해도, 그 뒤로는 민족주의와 국가주의의 정치 프로파간다가 작동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그 문제를 공식석상에서 지적한 논자는 최범 선생님뿐인 모양입니다. 그렇다면, 그러한 시각과 입장의 차이는 왜 나타나는 것일까요? 아마도 현대적 의미에서의 개인주의를 체득한 자와 아닌 자 사이에 존재하는, 타협 불가능한 가치관 차이 때문이 아닐까요? 구미의 사회 비판적 리얼리즘은 개인주의를 기본 전제로 했습니다. 하지만, 한국에선 대체로 그렇지 않았습니다. 선전/국전 체제를 중심으로 한 아카데미즘으로서의 리얼리즘 미술에서도, 사회 비평적 리얼리즘으로서의 민중미술에서도, 개인주의적 예술가상, 즉 현대적 개인으로서의 예술가상은 온전히 전제된 적이 없습니다. 따라서 저는, 한국의 진보파 미술에서 드러나는 민족주의적 강박을 비판하고 극복하기 위해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왜 한국의 정치적 현대미술에선 개인주의가 오작동 혹은 기각돼야 했는가?”

그리고, 최범 선생님께서는, 주요 논자들이 ‘소녀상’의 핵심 가운데 하나가 장소성이라고 주장한 바를 잘 정리해주셨지만, 그를 따로 비판하지는 않았습니다.

장소 특정성의 의식은, 물성 탐구를 통해 장소의 현상학적 특정성을 감지하게 된 이후 형성됐습니다. 제도 비평적 장소 특정성의 단계를 거쳐 담론적 장소 특정성을 다루게 됐을 때도, 특정성의 원리라는 것은 사실, 형식주의(모더니즘)의 논리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모습이었습니다.

하면, ‘소녀상’은 제도 비평적 장소 특정성을 전제로 작업한 결과일까요? 아닙니다. 담론적 장소 특정성을 제 작업의 외피로 삼고 있을까요? 아닙니다. 장소에 결부된 작업이라고는 해도, 그것은 정치적 프로파간다를 위한 것일 뿐으로, 장소성이 작업의 필수불가결한 일부로서 다뤄진 바 없습니다. 최범 선생님께서 인용한 주요 논자들의 해석은, 장소 특정성 개념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소녀상’ 이전 논의에 대한 반대 논리를 개발하기 위해, 억지로 꾸며낸 이야기일 가능성이 높다 하겠습니다.

또한, 장소 특정성의 논리를 야기한 감각은 반물신주의였다는 점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즉, 환영성을 거부하고 해체하는 감각이, 장소 특정적 미술의 대전제입니다. 한데, ‘소녀상’은, 어떤 정치적 믿음과 태도를 위한 환영주의적 물신에 가깝습니다. 환영주의에 바탕을 둔 채, 사람들의 감정이입과 행동을 유도하고, 그를 통해 살아있는 존재처럼 제 권리를 주장하는, 일종의 의사-인격체로 전화된 상태가, 오늘의 모습입니다.

“피해 경험의 특권화를 통”해 “도덕적 우위를 확보”하는 일에 집착하는, 한국의 진보파 미술의 병폐를 극복하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최범 선생님께서는 “의식의 개혁”을 말씀했습니다. 하면, “인문주의 예술관”은 “의식의 개혁”을 통해 획득 가능한 것일까요?

제 질의는 여기까지입니다. 감사합니다. ///

*동아시아 화해와 평화의 목소리 제3회 심포지엄 질의. 2017년 7월 1일 토요일, 출판문화회관 4층.
**최범의 "소녀상과 미술 담론-‘소녀상의 예술학’ 토론회를 통해 본 한국 진보 미술계의 의식"은 다음의 링크로: http://www.critic-al.org/?p=3963
***애초의 주최 측 설명과 달리, 특정 정치적 맥락으로 심포지엄을 활용하려는 듯한 인상을 받았다. 허락을 구하지 않은 온라인 생중계 정도는 약과였다. 그에 관련해 참여자 몇몇의 항의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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